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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막하에 문사와 무사를 극히 선택하였다. 공 또한 함께하게 되어 용
강현령에 배수되었다. 신미에 철산부사에 승진되고 을해년(1635)에 수안
부사로 옮겼으며 얼마 아니 되어 충청수사로 나갔다. 이것이 공의 평생
이력이다.
부인은 성주(星州) 이씨로 고려명신 문열공 조년(兆年)의 후손으로 성품
이 본래 단정하고 성실하며 정숙하였다. 예절을 스스로 지키고 친척들
이 모두 마땅해 하였으니 고녀(古女)의 사풍(士風)이 있었다. 병자년의 난
리에 지평 용문산 중에 피난하였다가 강도 함락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
을 찔렀다. 이때가 정축년 정월 19일이었다. 이때는 강도가 함락되기 3
일 전이었다. 대개 길에 소문이 자자한 것에 기인하여 와전된 것이 그
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이는 36세였다. 조정에서 듣고 가상하게 여
겨 그 문에 정려했다. 공과 더불어 용문(龍門) 동쪽의 광탄(廣灘) 서좌(西坐)
건향손원(乾向巽原)에 합장했으며 선대부(先大夫) 부친묘에서 소의 울음소
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남자 재후(載後)는 무과이고 사인 임유(任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
가 있는데, 남자 석구(錫龜)는 감찰 박상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자 2명
이 있는데 창부(昌溥) 현부(玄溥) 이다. 여자는 황성구(黃聖龜)인데 통정 목
사(通政牧使)이다. 계자(繼子) 민(旻)이 있다. 측실 남에는 석룡(錫龍)이고 여
는 이상우(李相佑)이다.
내가 태어난 후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공이 충의대절이 있음을
익히 들었다. 성장하면서 부친과 함께 지낼 때 강도(江都)의 일을 들을 수
있었으며, 시원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존경하였다. 이미 또 조우(趙友) 말
을 듣고 또한 놀라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이제 비로소 가장(家狀)
을 참고하여 위와 같이 써서 조우의 책함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
지하에서도 의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족손 통훈대부 행 성균관사예(成均 司藝) 석규(錫圭) 재배하고 쓰다.
258!충청수영(忠淸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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