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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되었다고스스로에게확신하고있었다.

남,
김남응 선생은 천안남산초등학교를 입학하여 5학년까지 다니다가, 해방이 된 1945년


서울로이사를하여서울소재장충초등학교를졸업하였고,중학교는서울사범학교를다


녔다.그러던중,6.25발발로인해고향으로피난을왔는데,그당시천안지역에는고등학


교가천안농업고등학교만존재했었다고한다.


무오선생께한학과사서삼경,붓글씨를배운시기가이시절이다.그래서농업고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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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편입을 하여 1년 반 정도를 재학하다가 졸업을 했다. 대학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
는집안형편과학업성적때문에성균관대학교불문학과를입학할수있게되었다.그리고
졸업을하였고,대학원을진학한후에,군대를다녀왔다.
군 생활 시절에도 선생은 보기 힘든 고학력의 수준급 인재였기 때문에, 군상급자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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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 장교에게 프랑스어 교육도 해주었다고 한다. 흔하지 않은 군대생활의 한 예라고 볼
수있다.
사회에 다시 복귀한 그는 서울 용산에서 자동차 공업사를 운영하다가 손해를 보게 되
자, 단기간 만에 손을 떼고 30대 초반의 나이로 병천 가전리로 다시 오게 된다. 요즘 소위
말하는스마트했던그에게지역어르신들께서는문화원장을맡아달라고부탁하였고,그
역시문화원장으로지역에서활발하게활동하게되었다.당시의문화원은사설백전문화
원으로안동김씨종중에서설립한문화원이었기때문에종중내관계자들이문화원장과
당시의 문화원에서 행해지는 업무(국가홍보영상, 영사기 시청 등)을 병행해 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5대문화원장이된그는아버지의가업인양조장도운영하게된다.사업이잘되니,자
본을교육에쏟고싶었다.그래서낙후된시골지역의어린학생들에게자연스레그가가르
칠수있는모든것들을가르치게되었다.양조장건물지붕아래글씨를가르치던그에게
가정형편이어려운학생들이모였고인원은꾸준히늘어나감당이안될정도였다.
아우내중학교
양조장 지붕아래 비를 맞아가면서 배움에 목말라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는 그는 학교
를세워야겠다고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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