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52페이지

26페이지 본문시작

은거하였다. 600여 년 전의 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과거의 정의를 생각해서 개국원종공신으로
책훈하고 김녕군으로 봉하면서 예조판서의 벼슬을 주며 여러 차례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스스로‘송암(松菴)’
이라 호를 짓고 산속에 숨어서 충절을 지키며 일생
을 마쳤다. 이성계는 그의 충절을 기리며 도고산 자락을 윤음으로 사패하였다. 묘는 그가 살던 도산
리 마을 뒷산 자락에 있다.
부인은 밀양박씨이며 외아들 익생(益生)을 두었다. 김익생(1388~1450)은 자(字)가 정부(靜夫)이고
호(號)는 성재(省齋)이다. 어머니가 병환 중인 한 겨울에 호랑이의 도움으로 배를 구해드려 낫게 했다
는 효행으로 이미 18세 때(1405년) 효자정려가 내려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문무의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김익생이 부인 대구서씨 사이에 광구(光구)와 광기(光耆) 등 2남2녀를 두며
점차 손이 퍼지기는 하였으나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후손들은 도고면 도산리를 중심으로 오암리와 화천리 등 일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해방 직후에
는 100여 호가 되었으나 지금은 50호 정도가 되며 아산 시내 지역과 서울에도 많이 살고 있다.
-김질의 묘-
-효자 김익생 정려-
[25] 광산김씨 김징
김담
형제
| 金澄
| 金湛
< ? ~ ? >
< ? ~ ? >
조선 후기의 인물로 광산김씨(光山金氏) 31세이며 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인주면 문방리
지역 입향조이다. 과천에서 살았다. 인주면 문방리는 지형적으로 삼면이 바다여서 피난처로 적지이
므로 징(澄)과 담(湛)형제가 이곳 문방리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26
아산입향조 |

26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