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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옛 자취를 찾아서
공주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송정의 세 서당 이야기
속에서 좀더 안온한 땅을 찾아 송정리
로 이사했다. 특이한 것은 윤억중이 서
당을 열고 한학을 가르치면서도 돈을
조선조 충청권을 대표하는 학자였던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윤억중
윤증 선생의 터전인 노성서원의 인근
의 장남으로 아직도 아버지가 살던 터
마을인 남산리에는 윤씨 문중에서 일
를 지키며 살고 있는 윤석조(尹錫兆)의
찍 터를 잡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증언에 따르면 자기 집안의 살림이 넉
송정을 중심으로 이주해 와서 살던
넉하지 못한 실정이라서 가세(家勢)가
윤씨 문중에서 대를 이어 서당을 운영
기우는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
해 왔었는데 1900년대부터 1930년대
는데 학동(學童)들에게 어떤 재화(財
후반까지 30여 년 동안 서당이 문을
貨)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닫아 하나도 운영되지 못하였다 한다.
윤억중이 이 마을에 들어 서당을 열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증언하는
면서 1940년대에는 조 선생 또는 조
노인이 없어 알 수 없는 일인데 1930
대감으로 불린 조만손과 최 선생으로
년대 후반에 파평 윤씨 문중의 한 사람
불린 최영설의 조부 최철창 역시 외지
인 윤억중(尹億仲)이 이 마을로 이사를
에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 서당을
하였고 이사한 다음 해부터 서당을 열
열었다.
고 한학(漢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산 넘어 남산골에서는 금광이 발견되
윤억중은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현실
마지막 서당 전경
JUL/AUGㆍ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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