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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로 인해 죽게 되자 이를 보고 3일 동안 통곡하니 호랑이가 와서 그 산돼지를 물어 죽였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도 한결같이 하였다고 한다. 이미 1399년(정종 1)에 생정(生
旌-생정려)이 내려졌으며 그의 효행 사실은 아버지 희도의 효행과 함께《동국신속상감행실도(東國新續三
綱行實圖)》
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1438년(세종 20)에 79세로 그가 세상을 뜨자 왕(세종)이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발상發
喪)하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官)에서 장사를 치러주게 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고, 경
기도 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온양으로 운구하던 중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간 곳이 사패지지(賜
牌之地)로 정해졌다고 하며 그가 타고 다니던 검은 소도 그가 죽자 스스로 굶어 죽어 그의 묘 아래에 무덤
을 만들고‘흑기총(黑麒塚)’
이라 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충신접예왈문(忠臣接禮曰文) 청백수절왈
정(淸白修節曰貞)’
이라 하였다. 국가지정 사적 제109호‘아산 맹씨행단’
과 중요민속자료 제225호‘전세
맹고불 유물’
, 삼상당(구괴정), 효자비 등 그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남아 있다.
[32] 맹석흠
孟碩欽
<1429(세종 11년) ~ ? >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온양에서 출생하였다. 좌의정 사성(思誠)의 증손이고 감찰 귀미
(歸美)의 손자이다. 세자익위사 세마(洗馬) 계증(繼曾)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 도총제 방위(邦緯)
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 윤(尹)씨로 군수 근(瑾)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회령진 판관을 지낸 것으로
보이며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도총
사(都摠使) 귀성군 이준(李浚)의 휘하에서 토벌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봉해졌다. 이어
건주 여진 토벌에도 김계종(金繼宗)·김근사(金謹思) 등과 함께 1등의 군공을 세워 세 계급 승차했다. 이
듬해 세조의 온양온천 행차 때 호종하였고 1472년(성종 3) 가선대부 신창군(新昌君)으로 책록되었다. 그
러나 이듬해 부정에 개입한 죄로 추국을 당하고 삭직과 함께 여산(礪山)에 부처(付處-귀양)되기도 하였으
나 1475년 고신(告身-직첩)을 돌려받았다.
1479년에 가정대부 신창군, 1485년(성종 16)에 다시 가선대부 신창군에 책록되고 건공장군 호분위 대
호군으로 부조묘(不 廟-불천위)의 명을 받았다. 신창 맹씨는 중시조 의(儀)의 6세손, 계증의 아들대부터
파조로 하여 분파되었는데 석경(碩卿)이 사직공파(司直公派), 석준(碩俊)은 호군공파(護軍公派), 그리고
그(석흠)는 신창군파(新昌君派)의 파조가 되었다. 묘는 사패지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 성덕산(불곡산) 기
슭에 있다. 그로 인해 분당 당모루 지역에 맹씨가 세거하게 되었다고 하며 맹씨들의 묘가 많은 영장산(靈
長山)을 맹산(孟山)이라고도 한다.
[33] 맹세형
孟世衡
<1588(선조 21년) ~ 1656(효종 7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제학 희도(希道)의 9세손이며 사첨시정 익선(翼善)의 증손자이
다. 증사헌집의 유백(惟白)의 손자이고 증좌승지 희(喜)의 아들로 온양 출신이다. 열녀 정문을 받은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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