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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풍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여 1960년대까지 덕산 읍내리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박상쇠의 풍장이 있었다. 박상쇠풍장은 뒤에 자세히 기록하겠지만
타고장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타 고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항은 다음
과 같다.
1970년대 이전 우리나라는 어느 곳이나 가난과 전쟁의 연속이
첫째, 정기 적인 연습
었으며 문화적인 암흑기였다. 이런 시기에 젊은 남자들을 모으고 일정한 장소에서 풍
장의 예능을 가르치고 배우며 기능의 발전을 위한 연습을 행한 고장은 타 고장에서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기본적으로 예산 박상쇠풍장의 판은 평택 안중장을 중심으로
둘째, 풍장 판재의 정리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웃다리판재다. 그러나 연희의 순서나 개인의 특기를 자랑하는
풍장과 판의 구성을 타고장의 판재와 다른 면이 있다. 이는 순전히 타고장에 앞선 풍
장을 배워 와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지역의 마을 풍장 중 우수한 것을 함께하
는 풍장 마당으로 예산의 풍장 마당 판을 정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박상쇠는 개인예능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매우 집중적인 노력을
셋째, 전문 예능인 표방
행한 사람으로 보인다. 상쇠, 열두 발 상모, 버나 등의 예능인은 자신이 직접 사람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지도했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문 풍장패로 고장의 풍
장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일제강점기 말, 이른바 대동아 전쟁 시 우리나라 농촌은 민
넷째, 오랫동안 계속되었음
속의 암흑기였다. 일제가 두레를 세우지 못하도록 했고, 젊은이들이 대거 징용에 차
출되었다. 전쟁을 위한 물품 공출도 매우 심하여 풍장을 치기 어려웠다. 박상쇠가 풍
장패를 모은 기간도 일제의 영향으로 4~5년을 걸렸다. 해방 후에도 바로 시작하지 못
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에도 치지 못했다.
2장 예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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