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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을 계기로 외가 동네인 백암리에 일곱 살 때부터 살게 되었다. 거기서 평생의 친구인
이건열을 만났는데, 이건열은 이순신의 형님인 율리공 이요신의 직계 후손으로 역시 백
암리에서태어나살아온역사의산증인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어른들의 교육열은 지금 못지않았다. 요즘 학생들에겐 상
상할 수 없는 먼 통학거리를 걸어서 다니면서 그는 온양시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
쳤다. 당시 곡교천은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으며 장마가 지는 계절에 물이 넘치면 나룻
배를 운영하였는데 인근 고을 모두가 활용했다. 배삯은 여름에 보리 한 말과 가을 벼 한
말을내야했다.
유년시절에는 지금의 현충사 너른 공간이 온통 논과 가옥이었고, 현충사 연못의 500
년 느티나무는 단오날 그네를 뛰었으며, 충무공이 말 달리던 1킬로에 달하는 산등성이
치마도를 내달렸었다. 이제는 현충사 뒤편의 조용한 마을이 된 백암리에서 오순도순 옛
이야기하면서마을을내려다보고있다.
현충사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시작과 함께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이는 백암리 마을로서
는 천지가 바뀌는 상황으로 전개된 일이었다. 정부가 앞서 추진한 성역화사업으로 전통
마을인 백암리 주민은 주민 의사와 상관없이 일괄된 16평 가옥군으로 제비뽑기하여 강
제이주를 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백암리의 가옥과 농지는 모두 현충사의 너른 광장으
로 조성되었으며 추후 건설된 주차장으로 인해 백암리의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
었다.
강제이주는 살림살이가 제각각인 주민들에겐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낳았다. 세월
이흘러감에따라집을고치고증축하면서생활을해야하는백암리주민들은2층이상
의건물은올리지못하게법으로규제를받았다.게다가마을은현충사권역에서보이지
않도록 나무숲으로 가리는 가운데 존재감이 없는 조용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백암리
주민들은 마을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현충사 뒤 방화산 9부능선에 있는 샘제를 통
한산신제를이어왔고,제사에임하여엄격한제관의선정과부정타지않도록삼가는절
차를 존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노령화 되는 시골마을과 축소되는 인구현상에 따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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