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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김남응선생은1935년2월천안지역병천면가전리에서7남매중둘째아들로태어났다.




첫째였던형은서울사범대를재학하던도중6.25사변이발발하여행방이묘연해졌고,




남동생은한국전쟁피난때,가전리집에서화재가나서안타깝게어린나이에유명을달




리했다. 이렇듯 그는 가정의 장남이 되었고, 그 책임감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90년 가까




이잘짊어지고오셨다.


,



그의 부친은 그 당시 서울서,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 하시다가, 해방이 되면서 건강



이 좋지 않게 되자, 조부모님이 계신 고향인 병천 가전리로 자연스레 피난을 오게 되었다.

농촌지역으로 오게 된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
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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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병천에 있는 양조장을 인수하였다. 사업 수완이 꽤나 탁월했던 그의 부친은
사업이잘됨에따라,우리지역성거양조장,경기연천의전곡양조장(군납)도경영하고,지
금의 아산지역의 둔포양조장도 경영하면서 재산을 꽤나 축적하였다. 참고로 성거양조장
은누이에게,둔포양조장은김남응선생의둘째아들에게운영권을물려주었다고한다.
그때당시의양조장사업은독점사업이었기에,부친의몇몇양조장들은그야말로탄탄
대로였다.사회전반적으로배고프고제대로된교육을받기가매우어려운시절이었지만,
집안의재산을기반으로,그는보통의다른이들보다는학업에매진할수있는환경속에
서학생의삶을걸어올수있었다.
학교라는의미
사업에 바쁜 아버지셨지만 시간이 날 때 마다 책을 자주 펼쳐보셨다. 그래서인지 한문
공부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아들에게 강조하였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김남응 선생도
부친과크게다르지않았다.
서울에서천안으로피난을오고나서6개월동안할것이없었다.그래서그당시박문수
어사(현재의 북면 은지리 소재)의 7대손 무오 박남희 선생께 한학교육을 받았고, 신문지
에붓글씨를배운것이김남응선생이평생의삶중에손꼽힐만큼잘한일이라고한다.그
리고지금의삶을살아오면서,또한그만큼의다양한사회생활을영위하면서크나큰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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