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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610년에
주간에는 각각의 장방형의 섬돌이 설치되어

현재의자리로이전하였다고전한다.
있으며 측면은 회사벽으로 되어 있고 배면의


온양향교 대성전에는 오성과 송조이현 그리고
경우에는 어간과 협간에만 창호가 만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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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8현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있는데 이들은 2분합문의 궁창판이 있는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띠살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온양향교에는
향교부지는 1,945평으로 현존건물은 1982년에
전적과 고문서 등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충청남도기념물
전면 보수한 것이다. 남향으로 이루어져 있는
소수의 소장도서는 모두 최근에 만들어진
제115호온양향교
향교의 건물배치는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양장도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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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있고 같은 해
건축을만나다
건립된 홍살문이 있으며, 명륜당과 동재
대성전은내.외삼문과담장으로둘러쌓여있으나
서재는현재남아있지않다.
향교건물의 규모는 대성전 19평, 명륜당 20평,
동재 11평, 기타 건물 4동 22평이다. 이 중
대성전은 중층기단위에 만들어져 있는데 건물은
충청남도 아산시 외암로 1414-11(읍내동)에
온양향교의 창건연대와 창건당시의 위치 및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을 한 익공식의
위치한온양향교는매월초하루날과보름날에제
온양문화원
김 형 기
중간의 변천사 등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형태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로 되어 있고
40대 전교님을 중심으로 100명의 유림회원들과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는 것이 아쉽다. 다만
그 위에 자연초석 및 원형초석이 함께 사용되고
명륜회라는젊은청년들이모여분향예를올리고
온양의 연혁을 보면 고려전기(현종 이후)에는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의 초석 중에는 재사용한
있으며 매년 음력 2월달과 8월달 상정일에
천안부의 임내였고, 명조 2년(1172)부터
것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석 위에는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다. 겨울방학에는 관내
감무가 파견되다가 조선 태종조에 비로서
배흘림의 원주를 세웠다. 건물의 전퇴간은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충.효.예를 가르키고
현감이 파견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태종
고주와 평주가 퇴량에 의해 결구되어 있다.
있으며 가을에는 지역 주민을 초대하여
14년에 신창현과 변합되어 온창현으로 고쳐져
정면의 3간은 모두 궁창판이 있는 2분합문의
향교 풍류음악회를 개최하고 매년 거행되는
현감이 파견되기 시작하다가 태종 16년
띠살창호로 만들어져 있으며 좌우 측면은 회와
고불맹사성 숭모제를 주도하는 등 다양한
온천에 거동하면서 온양군으로 승격되었는데
돌을섞어만든반담이설치되어있다.
일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인
온양향교도 조선태종조 이후에 창건되었을
중국(한국공자문화학당)에서도 온양향교를
것으로추측하고있다.
배면은 회사벽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박공
방문하여 석전대제 진행 과정과 대성전 봉행례
밑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고 명륜당은 전면
등 유림들의 활동 전 과정을 촬영하며 한국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온양군 학교조에 향교의
5간측면2간의팔작지붕을한도리식건물이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적극 홍보하고 중국에서
위치가 읍의 서쪽 1일 지점에 있다고 되어 있는
화강암으로 된 중층의 기단 위에 자연초석이
널리전파하겠다고하였다.
것으로 보아 적어도 중종조 이전에는 향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명륜당이란 판액이
설립되어있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걸려있다. 좌우의 협간은 2분합문으로 역시
그런데 현지의 구전에 의하면 온양향교는 원래
띠살문이며 측간의 경우는 중앙 3간보다는
지금 위치인 읍내동에 인접한 법곡리(능뫼)에
작은문으로이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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