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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 태종, 세종 때에 축성되어 종2품 병마절
도사가 서해안을 지켰고 효종임금님 때부터는 겸영
장이 내포 13개 군현의 지방군을 훈련하고 지휘
하며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여 조선시대 500여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동헌 뒷동산 의 소나무를 자세히 보면 아직도
송진채취의 상처를 안고 서있는 소나무들이 있다.
해미읍성의 관아건물을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해미읍성내 소나무
동헌과 객사만 남겨 면사무소와 학교로 사용하게
했으며 읍성내에 일본의 신사(神社)를 짓고 토지까지 매각하여 민가가 들어서게 했다.
13개 군현의 구심점이 되었던 해미읍성을 파괴했고 병영의 지형지물로 이용 되던 동헌 뒤 산의
소나무마저 송진채취를 시킨 것은 우리의 정신력을 파괴하기위한 계획된 소행으로 생각된다.
산에서 소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산림을 훼손하는 자를 치도곤으로 엄히 다스리며 치산을 지방수령의
덕목으로 삼아 가꾼 소나무를 일본전쟁물자로 쓸 송진채취로 황폐시켰다. 또 일본은 해미면 산수리에
광산을 개발 많은 양의 금을 채굴해 갔다고 전해온다. 금 광산 개발로 재미를 본 일본은 산수리에 변전
소를 짓고 전기를 끌어드려 광산개발을 더욱 확대하여 지금도 산수리에는 여기 저기 광산의 흔적이
남아있다.
운산면 태봉리에 있던 조선 13대 명종대왕태실은 조선총 독부의 지시로 서삼릉으로 이봉(移封)되고
태실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5년에 외형만 복원되었다.
일본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자명한 사실을 왜곡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자기나라의
영토라고 교육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무섭고 경악할 일인가. 잘못한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언젠
가는 우리나라와 분쟁과 충돌을 야기 할 수밖에 없는 불행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일본 강점기의 역사는 세대가 지날수록 자취가 없어지고 흔적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간다. 아직 남아
있는 증거들을 찾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앞에서 정직할 때 우리가
불행했던 역사 속에서도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후손들에게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
우리나라를 맡길 때 일본과 진정한 우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세대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유기하는 것은 역사 앞에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죄 값은 우리의 후손의 몫이 될 것이다.
개심사 입구에 들어서면 아직도 송진채취의 상처를 안고 버텨온 소나무가 있다.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 동료소나무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라도 하는 것만 같다.
아라메길이 이제는 서산시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늦었지만 이 기회에 아직도 일본침략의
흔적이 남아있는 명종대왕태실, 운산면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상왕산 만세봉, 개심사 절산,
해미읍성, 산수리 폐금광굴을 연결하는 답사길을 개발하여 청소년들이 심신을 달련하며 일본을 이해
하는 국민정신교육 코스로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봄직하다. 우리국민이 역사를 바로알고 용서는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역사는 잊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료를 주신 분 : 송학구(운산면 신창리), 김동호(운산면 신창리), 채두석(해미면 산수리)
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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