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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정국이 안정되자 현실을 인정하고 왕의 부름과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예조의
랑·좌부대언·이조참의 등을 거쳐 1407년(태종 7)에 예문관제학으로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진
표사(進表使) 양녕대군의 시종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1408) 한성부윤 겸 세자우부빈객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에 올랐으나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趙大臨)의 음모를 물어 심문한 죄로 서천 한산으로
유배되었다. 1416년(태종 16) 이조참판으로 복직하여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417년 생원시의 시관(試官)
과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부친의 간병을 위해 잠
시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의정부찬성사를 역임했다. 1425
년(세종 7)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
는 처음으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으며 1427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세종 11) 그가 70세
가 되자 왕이 궤장( 杖)을 하사했다. 이듬해에《태종실록(太宗實錄)》
을 감수했고 1431년(세종 13) 마침내
좌의정에 올라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하면서《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를 찬진(撰進)하는 등 많
은 업적을 남겼다. 1435년(세종 17)에 고령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에 관한 의미 있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검은 소를 타고 다녔고 피리를 즐겨 불었으며 그가 불던 옥저
(옥적)가 지금도 전해진다. 온양을 오갈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한 수령이 놀라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렸다
는 인침연(印沈淵) 일화, 공당 문답 일화, 그가 살던 집에 빗물이 새었다는 얘기 등 매우 많다. 그 중에서
도 태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종이 보고 싶어 하자‘실록은 모두 당세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임금께서
만약 한 번 읽어 보신다면 사관이 두려워해서 그 직분을 다할 수 없으니 어찌 실록을 장래에 믿을 수 있겠
습니까?’
라고 하자 왕이 그 말에 따랐다는 일은 그의 올곧은 품성을 말해준다. 그는 문화 예술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법전인《육전수찬(六典修撰)》
, 지리서인《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 역사서
《고려사(高麗史)》
《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함께 하였다. 또한 태종 때부터 이미 관습도감 제조를 맡
았으며 세종 때까지 음악을 정비하고 악공을 교육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교과서에도 실린 강호사
시가(江湖四時歌)를 포함하여 여러 시편이 전해진다.
그가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임은 잘 알려져 있고 효자로도 유명하다. 10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7일간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질 만큼 3년 동안 눈물로 애통해 하였다. 무덤 앞에 있던 잣나무가 산
<맹사성 표준 영정(일부)>
<삼상당(구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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