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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맞아 30여 척의 왜선을 격파시켰다. 그리고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자
적들은 견디지 못하고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무술(선조 31년, 1598년)년에는 명(明)나라 장수 진린(陣璘)이 광동(廣東)의 군사
를, 유정(劉綎)이 사천(四川)의 군사를, 또 등자룡(鄧子龍)이 절강직예(浙江直
군사를 각각 이끌고 연달아 왔었는데 충무는 고금도(古今島)로 나가 진린(陣璘)과
함께 진을 합쳤다.
이때 진린(陣璘)은 진심으로 그 재주와 책략과 기량과 능간(能幹)에 굴복하여 모든
군중의 기밀을 처결함에 묻지 않는 일이 없었고, 우리 선조(先祖)대왕께,
「이순신(李舜臣)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공이 있는 분이라.」
고 아뢰었다. 또 명나라 현황제(顯皇帝)에게도 자세히 아뢰어 충무(忠武)에게 도독
인(都督印)을 내려주게 하였다. 그때는 이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소서행장
(少西行長)이 철병하고자 하였다. 곤양(昆陽)과 사천(泗川) 등지에 진을 치고 있던
저희 군사들끼리 약속한 날을 정하여 노량(露梁)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충무는 명나
라 장수와 수군을 정돈하고 서로 협력하여 왜군을 섬멸할 것을 의논했다. 그런 뒤,
배 위에서,
「오늘이야말로 사생을 결단하는 날이오니 하늘이여 내게 이 적을 무찌를 수 있도
록 허락하여 주소서.」
하고 빌기를 마치자 이때 장수별이 떨어졌다. 모든 병사가 불길하게 생각했다. 새
벽녘에 적을 맞아 싸워 2백여 척을 무찔렀다. 다시 추격하여 남해(南海)에 이르렀을
때 적이 명(明)나라 군사를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충무(忠武)는 화살과 포탄
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다 탄환에 맞아 돌아가셨다. 그가 을사년 생이니
나이 54세였다. 이듬해에 아들 회(
) 등이 아산으로 모셔가 장사를 지냈다. 갑진년
(6년 뒤, 1604년)에 훈공을 정하여 호를 내렸다. 증직은 의정부좌의정덕풍부원군
(議政府左議政德豊府院君)이요,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그리고 싸움을 했던 터에
사당을 세워 지금껏 끊이지 않고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어
찌 그 공훈을 표창함에 족할까 보랴.
슬프다.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이 나기로는 목릉(선조의 陵號) 시대를 맞아 제일이
라.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아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던 장수들 모두가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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