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4페이지

27페이지 본문시작

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15] 열녀 막개 <莫介>
청나라 적군에게 정절지킨 여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열녀로 아산현에 살던 김석복이라는 사람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나라가 짓밟혔을 때 절개를
온전히 지켜서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16] 효자 맹희도 <孟希道>
1337년(고려 충숙왕 6)~1423년(세종 5) 추정
3년 시묘살이에 흰 새도 날아와 머물러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고 학자이며 효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며 신창맹씨 중시조인 맹의(孟儀)
가 그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는 고려 말의 충신
두문동 72현 맹유(孟裕)이고 어머니는 능성(綾
城) 구(具)씨이다. 호는 동포(東浦)·호전(湖
田)이다. 주로 개경에서 살았으며 정몽주·권근
등과 절친하게 교유했다. 1365년(공민왕 14)에
문과 급제하여 수문전제학(정3품)에 까지 올랐
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의 위화도 회군 이
후 고려가 위기에 처하고 아버지 맹유(孟裕)가
▲ 맹희도의 묘
두문동 골짜기로 들어가 순절하자 그는 아버지
의 명에 따라 충남 서천 한산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부친의 가묘를 모시고 삼년상을
마친 뒤 1392년경에 온양 금곡동(현재의 아산시 배방면 중리)으로 와서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의 집(현재의 맹사성 고택)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그 후 벼슬을 거부하고
오직 학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였으니 그로부터 온양 일대에 주자학(성리학)이 본격적
으로 전파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여 직접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여막에서 3년
시묘를 하니 흰 새가 날아와 머물렀다 한다. 고려가 망한 해인 1392년(공양왕 2)에 이미
생정려(살아 있을 때 내린 정려)가 내려지고 서천 한산에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즉위 후 다시 정려를 명하여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정문이 세워졌고 효자비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효행은《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아들의 효행과 함
께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
25

2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