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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았다. 이때 넣는 띠를 ‘적심이’라고 하였다. 흙으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겨울에 따뜻하
고 여름에 시원하였다. 방문(門)은 나무로 틀을 만들어 대나무로 만들었다. 대나무를 자
리 엮듯이 성글게 엮어 나무틀에 붙이고 창호지를 발랐다. 방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치는 경우가 많았다. 툇마루는 없는 경우가 많았고, 이상모의 집은
떠밀린판자를주워만들어사용하였다.
황도에는 먹는 샘이 1개 있었다. 12가구가 살 때에 물이 늘 딸렸다. 이후 주민이 줄어
6가구가 되었을 때는 충분하였다. 황도에는 골짜기마다 물이 나오기 때문에 골짜기마다
샘을팠고,빨래하는물로사용하였다.이런물은먹지않았다.
이상모는 1969년에 외연도로 이주하였다. 황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곧바로 1973년
쯤에모두이주하였다. 당시 군산앞바다 십이동파에 간첩이들어오는 사건이 있었고, 정
부에서는작은섬에있는소수의주민들을모두큰섬이나육지로철수시키는사업을시
행하였다. 당시 이주민에게는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의 작은 집을 주고 이주하도록 하였
다.당시황도에살던주민들은형편에따라일부는대천으로이주하고일부는외연도로
이주하였다. 당시 새마을운동 때라 외연도에서는 백사장 모래땅에 집을 지어주었다. 당
시황도의땅은개인것이아니어서토지에대한보상을받을수없었다고한다.
황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당산이다. 당산에는 나무가 있었고 이곳에서 2월 보름날
당제를 지냈다. 당제를 주도했던 사람은 최연춘이었다. 당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젯날 당산에 ‘가방’이라는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새면서 지냈다. 제물로는 당산에서 돼
지를 잡았고, 돼지고기, 떡, 삼색실과 등으로 제를 올렸다. 그 때 이상모는 당산에 물을
길어다주는일을했다.
황도에사는주민들은집집마다모두배를가지고있었다.배가생활의수단이었다.배
의 크기는 길이 4m, 폭 1.3m 정도였다. 이 배를 타고 외연도, 어청도를 다니고 주낙을
놓고, 낚시질을 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황도 안에는 방파제가 없어 한시도 배를 바다
에 둘 수는 없었다. 작은 파도에도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뭍에 올려놓아
야 했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올려놓았다. 황도마을이 북풍받이이기 때문에 남풍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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