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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온천탕은 신정관 주변에서부터 개발되다 보니, 신천탕·용문탕·양진여관 등 서로


,
서로가까이밀집될수밖에없었다.당연히주변땅값이하늘높이치솟고그주변만발전이

?


될 수밖에 없었다. 온천수를 개발하였지만 비싼 땅에다 건물을 짓기에는 금전적인 부분에

?

어려움이 있었다. 박재학 씨는 온천수가 나오는 곳에서는 비록 떨어졌지만, 이곳까지 온천


수를 끌고 올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지었다. 건물
?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땅을 일정한 깊이로 파면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건물까지 끌고 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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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온양의온천물온도가평균57°를유지하다보니지하로오는동안에도결코물온도가
내려가지않았다.
청주온천탕을 개업하자마자 밀려드는 손님으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청주탕에 손
님이몰려들자주변에또다른여관이하나둘씩들어섰다.하지만이곳은온천수가안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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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역이다 보니 여관주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대
중탕에 안 가더라도 방에서 편안하게 뜨거운 온천수로 목욕하는 것을 원했다. 온천수가 없
는 여관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다수의 손님들
은 찾아왔다가 온천수가 없다고 하면 발길을 돌려 청주탕으로 찾아오는 실정이었다. 박재
학씨는이런현상을보고좋아하기보다는온양이관광도시로더발전하려면내것을저들
에게나눠주어야한다는생각이앞서주변여관에온천수를모두공급해주었다.
박재학 씨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모든 여관에 온천수가 공급되자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
어났다. 이로 인해 주변에 식당과 술집, 다방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급기야는 나이트클럽과
예식장등이들어섰다.온양의본전통거리가기존신정관주변에서서서히청주온천탕쪽으
로도확대되면서새로운도시가형성되었다.
박재학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하고도 인연이 깊었다. 1967년 3월 18일 현충사를 사적 제
155호로 지정했다.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온양에 오면
청주온천장에 자주 들르곤 하였는데 그때부터 인연이 생겼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진행
할즈음온양에서현충사가는도로를확장하면서길가가너무허전했다.박대통령이이곳
도로가에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당시에 동네 주민들을 대동하여 양 길가에
어린 은행나무를 심었다. 어린 은행나무를 심고 얼마 지나자 짓궂은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발로 차기도 하고 부러트리기도 하며 여러 형태로 훼손이 많았다. 이에 온양 경찰서장은 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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