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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소를 키울 만한 장소가 없어 1955년경 가족 모두 황도로 이주하였다. 1969년 외연
도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그의 가족은 15년간 황도에 거주하였다. 동생들 교육은 외연
도 친척집에 기숙하였다. 외가 쪽 친척들이 모두 외연도에 있어 동생들은 외연도 학교에
다닐수있었다.외연도에이주한후,아버지가50세때에돌아가셨다.그뒤는이상모가
동생들도 돌보고 자기 자식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업을
경영하면서 모두 극복하고, 자식들을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켜 훌륭하게 키웠다. 현재까
지어업을경영하면서외연도에살고있고,황도근해에서고기를잡고있다.
황도는 작은 낙도이지만 산 정상부분이 평평하고 풀밭이 넓었다. 소나무는 많지만 가
시덤불이 없고, 소가 좋아하는 솔새, 띠, 억새 등이 많아 소를 키우기 좋았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섬의 대부분이 국유지여서 소를 마음대로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소
를 2마리 이상씩 키웠고 12가구가 살 때는 30여 마리의 소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 3마
리로 시작하여 5마리까지 키웠다. 볏짚이 없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음력 7월에 베어 말
린건초를먹였다.
이상모가 황도에 들어갔을 때 최고 12가구가 살았는데, 모두 경주최씨였고, 고씨가 1
가구, 이씨(이상모댁)가 1가구였다. 경주최씨가 황도에 들어온 것은 당시 황도의 유지였
던 최연춘의 증조부라고 전한다. 그분의 묘도 황도에 있다. 그래서 황도의 경주최씨는
형제 또는 6~7촌 되는 모두 가까운 집안이었다. 따라서 황도의 생활, 당제 같은 것은 경
주최씨들이주도하였다.
황도의 집은 대부분 방 2칸, 부엌 1칸의 전형적인 초가삼간이었다. 9남매와 부모, 모
두 11식구가 초가삼간에서 생활하였다. 집은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소나무 기둥을 세워
지었다.이때소나무는4각으로깎지는않고,껍질만벗겨사용하였다.지붕은서까래를
얹은 다음, 작은 나뭇가지를 잘라다가 서까래 위에 엮고 흙을 개어 얹었다. 그리고 볏짚
대신 산에서 띠를 베어다가 덮었다. 벽체는 축담이라고 불렀는데, 흙과 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다.바닥에는돌을한줄쌓고,그위에흙을반죽해서올려, 돌과흙을교대로쌓
는 것이다. 이때 흙 속에는 띠를 썰어 넣어 튼튼하게 하였다. 육지에서 볏짚을 넣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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