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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사대장 장신이 지휘하는 수군은 갑곶 아래쪽인 광성진에 주둔
126)

고 있다가 적의 도하작전이 전개되자 갑곶으로 전진해 왔으나 적의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주사대장 장신은 퇴각명령을 내리고 말았
다. 충청수군만으로는 도저히 중과부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청군은 갑곶 나
루를 건너는 도하작전에 성공하여 강화도는 점령당하고 왕자 등 피난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어서 청군은 남한산성에 전력을 집중하여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
적 항복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패전 책임자 처벌로 검찰사 김경징은 사사되고 장신은 자
진하였고, 충청수사 강진흔은 잘 싸우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우후 변이척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열심히 싸우고
도 군율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충청수사 강진흔이었다. 강진
흔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연려실기술〈인조조고사본말:강화도가함락되다〉
○ 이때 경징(慶徵)은 방비와 수비에는 마음이 없어 초관(哨官)들을 풀어
주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섬 외에는 정탐도 하지 않으니, 식
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갑곶(甲串) 이하
에서 연미정(燕尾亭) 이북까지의 사이에는 일찍이 몽둥이를 가지고 있
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밤을 도
와서 들어와 원조하니, 경징이 강진흔이 거느린 배를 연미(燕尾)와 여
러 곳에 나누어 배치하고 경기도 배는 모두 광진(廣津)에 두었다.
126)조선시대 김포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은 갑곶과 광성진이었다. 당시 갑곶 부근은 충청수군, 광성진은 장
신수군그리고교동북진(北津)에경기수군이배치되었다.갑곶나루는지금의국도48호가지나는곳이다.
246!충청수영(忠淸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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