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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李敏求)
122)
를 부찰사(副察使)로 임명하여 방어에 임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방
어에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수군은 강화유수 장신(張紳)
123)
을 주사대장(舟師
大將)으로 임명하여 경기수영 휘하의 경기 수군을 중심으로 지휘하게 했다.
피신 행렬이 강화도로 들어가자 충청수영에서는 군함 7척과 200여 명의 수
군을 수사 강진흔(姜晉昕)과 우후 변이척(邊以 )이 지휘하여 강화도로 들어갔
다.
124)
강화도 염하(鹽河) 북쪽의 연미정(燕尾亭)
125)
부근에 배치되어 방어에 임하
고 있던 도중 1637년 1월 22일 청군이 연미정 아래 부분 건너편인 갑곶에서
대포(홍이포)를 쏘며 도하작전을 전개했다. 강진흔이 지휘하는 충청수군은 연
미정에서 악전고투하며 썰물을 거슬러 올라가 갑곶 주변에서 도하작전을 전
개하는 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다.
ㅈ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
화도 수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
아 함께 부임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
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방어책임을 맡은 그는 나룻
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는
원훈(元勳)의외아들이라고하여특별히용서하려하였으나대간의탄핵이완강하여사사(賜死)하였다.
122)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이조판서 수광( 光)의 아들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
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하여 배편을 준비하였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어가의 길을 막았으므로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
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
났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에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거의타버렸다.
123)장신(張紳, 미상~1637년) : 조선 중기의 문신. 1623년 인조반정 때 형 유(維)와 함께, 당시 궁궐을 수비하던
장인 이흥립(李興立)을 설득하여 내응하게 하는 한편, 직접 왕궁진입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
으로 유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그는 3등에 책록되었다.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江都)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
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124)1627년 정묘호란 후 조정에서는 강도방어의 필요성을 느껴 강화도 교동에 3도 통어영을 설치하고, 유사시
경기 충청 황해의 수군을 지휘하게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수군이 강도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것은그임무를성실히수행한것이다.
125)연미정은인천시강화군 강화읍월곶리에있는정자
2.충청수영본영(本營)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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