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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넣을때는입이나아가미를통해막대기로쑤셔가며넣었다.
호도 주민들은 대천장으로 많이 다녔다. 광천은 더 멀어 한물에 다니기 어려웠기 때문
이다. 호도에 장배가 있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일단 녹도로 가서 장배를 타고 대
천장을다녔다.여간불편한것이아니었다.
호도에도 1907년에 일어난 녹도 의병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육지에서 녹도 출신이라
고 하면 무조건 잡아가 숨기고 살았다든지, 녹도환란 때 누구누구가 죽었다든지, 녹도
맞은쪽 창배에 환란 때 녹도 사람들이 가지고 온 밧줄이 썩은 채 있다든지, 여인의 치마
폭으로사람을살렸다든지하는이야기가전해지고있다.
호도에서는 지관이 없다든가 너무 추운 때 돌아가셨다든가, 후손을 보지 못했을 때
초분을 했고, 특히 6월에 돌아가시면 초분을 했다. 6월에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면, 후
손이 죽기 쉽다는 속설이 있어서 6월에는 땅을 파지 않았다. 초분이 3년 정도 묵는 것도
있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매장할 때 보면, 어떤 시신은 썩어 뼈만 있기도 하고, 어떤 시
신을 바짝 말라 있기도 하였다. 호도 마을에는 서쪽에 공동묘지가 있고, 묘지에 상여집
도 있다. 정봉섭의 기억으로는 세 번 정도 상여를 다시 만들었는데, 새 상여를 사 오면
옛상여는모두불태웠다.상여를새로사올때노인을태우는것은보지못했다고한다.
상여가나갈때는북을치고나갔다.
호도 마을에도 정봉섭의 회갑 무렵까지 당제를 지냈다. 당집은 과거에는 작은 기와집
으로 있었으나 새마을운동 시기에 블록으로 크게 지었다. 당집에 모신 신은 알지 못한
다. 그냥 산신, 당산신 정도로 알았다고 한다. 당제는 마을에서 당주 1명과 발당주 2명
을 뽑아, 동짓달에 택일해서 지냈다. 호도에는 홍어잡이 배가 많아 겨울에 출어했기 때
문에 겨울이 시작되는 동짓달에 지낸 것이다. 제물은 대천장에 가서 소를 사다가 잡아
사용하였고, 떡과 밥, 과일 등을 올렸다. 제물을 마련하는 곳은 당집 아래에 평평한 곳
이었다.이곳을막태라고했는데,이곳에서소를잡고,떡방아를찧어떡도만들었다.절
구는마을의정갈한집에서가져다썼다.
당제는 마을 샘을 품고 봉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마을 샘을 깨끗하게 품어내
보령시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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