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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5~6개월 다닌 뒤에 그만 두고 호도에서 한문서당에 다녔는데, 열심히 공부하여
통감초권까지읽었다.
최기환(崔起煥)은 경주최씨로 할아버지가 홍성군 결성면에서 사시다가 호도에 사는 밀
양박씨와결혼하여호도에들어오게되었다.할아버지는부인을둘데리고한집에서거
주하였다. 할아버지는 아들 둘, 딸 둘을 낳아 길렀는데 딸 하나만 안면도 중장리에 살았
고, 나머지는 모두 호도에 거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여 남의 배를 타고 생활했
는데 1952년 2월에 홍어배를 타고 나갔다가 사망하여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4남 1녀를 남겨 놓았고 최기환이 장남이었다. 최기환은 호도의 동년배처럼 학교에 가보
지못했고13살에장가들었으며18살때부터배를탔다.
호도 주민들은 김, 미역, 가시리(세모), 청각 등을 뜯어 말려서 팔아 현금을 만졌다. 이
것은 홍어배 사고로 가장을 잃은 여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해초 중
에서도가장많은도움을준것이김이었다.주변섬에가서도뜯어왔는데,많이하는경
우에는5인가족이1사리(15일)에10동(1만장)정도를하였다.
호도는 외연도나 녹도와 달리 논이 있었다. 논이 20여 마지기 되었고 밭도 많았다. 그
러나대부분일본인땅이었다.해방후일본인들이들어간후,그땅들은정부땅이되었
고, 농사를 지어 땅값을 상환한 후 개인 땅이 되었다. 호도에는 농사짓는 땅이 많기 때
문에 소를 길러 쟁기질하는 집이 있었다. 정봉섭도 쟁기질을 잘 해서 남의 밭을 갈아주
기도 하였다. 소는 처갓집에서 길렀다. 남의 밭을 한나절 갈아주면 보리를 말가웃, 많으
면두말을받았다.호도에서는쟁기질도했지만따비로파는사람도있었다.
호도에는 학교가 없었다. 녹도에 있는 학교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통학할 수가 없었
다.해방후학교가설치되어남녀모두취학할수있었다.그들이현재일흔이넘었다.
호도에는 7척의 홍어배가 있었다. 이 배들은 풍선배지만 배가 커, 멀리 나가 홍어를
잡았다. 어청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나갔다고 한다. 이 홍어배들을 운영한 사람들
은 모두 부자로 이웃 사람들을 고용하여 6명이 출어하였다. 이 중 3차례에 걸쳐 4척의
홍어배가 침몰하여 단 1명만이 살아남고 23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호도에 거주하던 43
보령시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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