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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정 명 재
서산시문화관광해설사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옛날에도 개심사에 가는 길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개심사 경내를 알리는
일주문에 이르기 전 마을을 물레방아골이라 불렀는데 이곳에 곡식을 찧던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또 골이 깊다하여 깊은 골이라고도 했다. 물레방아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골짜기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았고 인적이 끊이지 않고 왕래가 빈번했으며 골이 깊어 산수가 수려
했던 곳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경관이 아름다워 마음이 머물고 쉼을 얻을 만한 곳이었다.
이 곳을 지나 일주문에 들어서면 찾아오는 이를 먼저 맞아 주는 곳이 세심동(洗心洞)이다. 그 이름이
개심사(開心寺)와 어울러져 깨끗한 몸가짐으로 마음을 열게 한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할머니들이 사월 초파일이오면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쌀 한 되
정갈하게 쓸어 깨끗한 보자기에 싸들고 동네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이 길을 따라 나들이 겸 개심사를
찾았다.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잘 드리면 자손이 번창 하고 할머니의 저승길이 밝다고 하셨다.
우리조상들은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을 의지하며
살아 온 개심사를 감싸주는 산을 절산이라 하여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소나무가 울창하였고
큰 소나무를 왕소나무라고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불러주었다.
그러나 이 왕소나무마다 밑등걸에 상처가 있었고
봄이 되어 성장이 시작되면 상처에서 송진이 흘러나
왔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전쟁물자조달을
개심사 입구 소나무
위해 송진(松津)공출 강요로 생긴 상처였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갖은 방법으로 수탈해가고
우리 국민들을 강제로 끌어다 힘들고 위험한일을 시켰다. 꿈에 설레던 소녀들을 정신대로 끌어갔으며
우리의 금수강산마저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부족한 물자를 해결하기 위해 강제로 거두어들이던 공출품목은 주로 미곡이었
지만 자꾸 그 품목이 늘어 잡곡 면화, 송진 등 총 40여종에 달했다. 이렇게 강제로 공출 하게한 송진은
목탄차의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에 크고 수세가 왕성한 소나무는 공출용 송진 채취로 거의 고사했고 송진채취의 화를 면한
그 후손들이 오늘의 개심사 절산을 지킨다. 하지만 오늘도 개심사를 찾는 관광객 중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2011_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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