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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金文起-사육신에 포함시키기도 함)의 6세손이다.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고 김현석의 아들, 즉 김응남의 고조 김충립(金忠立) 등 남은 가족들은 경북 상주 관아 등에
노비로 배속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들이 언제 노비에서 풀려났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로 김문
기는 1731년(영조 7)에 복관되고 1757년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응남의 증조는 김충지(金忠之, 초명은 忠智, 일명 衷之)이며 조부는 김영추(金永秋, 1542~?)이
다. 아버지는 김신학(金信鶴, 1583~)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이다. 아버지 때에 충남 서천군 서면으로
이주하였다.
김응남은 득대(得大), 득일(得一), 응남(應南) 등 삼형제 중 셋째아들이며 사연은 확인되지 않지만
아산시 권곡동으로 와서 자리 잡게 된다. 김응남에 대해서는 자(字)가 내천(乃天)이라는 사실만 전해
지며 부인에 관해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의 외아들인 지생(知生, 1610~?)을 중심
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응남의 아버지 김신학과 아들 김지생의 출생년도가 37년 차이가 나서 김응
남의 출생 시기 파악이 어렵고 뭔가 기록에 착오가 있다고 본다. 김지생의 출생년도를 기준으로 하여
400년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김지생 이후 김천익(金天益, 1638~?), 김상건(金尙建)까지 3대가 외아들로 이어져 왔다. 김천익은
통정대부 공조참의, 김상건은 가선대부 한성부좌윤에 증직되었다. 김상건은 부인 순흥안씨 사이에
순태(順泰)와 순망(順望) 등 두 아들을 두었으니 그 후부터 자손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응남의 묘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서천에 모셔졌고 그의 손자 혹은 증손자 대에 권곡동, 지금의 한
올고 앞산으로 옮겨 모셨다가 20여 년 전에 탕정면 용두3리 산골로 옮겨 모셨다. 증손자인 김상건의
묘는 권곡동(온양민속박물관 뒷산)에 있다.
김응남의 후손들은 권곡동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주로 현재의 시내권에 거주해왔다.
[22] 연안김씨 김의수
| 金義秀
<1821년(순조21년~1897년(고종34년)>
조선 말기의 인물로 연안 김씨(延安金氏) 22세이며 구례현감파(求禮縣監派) 음봉면 신휴리 입향조
이다.
부인은 남원(南原) 양씨(梁氏) 선재(善在)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택연(宅淵)이고 양부(養父)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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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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