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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맹만택
孟萬澤
<1660(현종 1년) ~ 1710(숙종 36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통정대부 세형(世衡)의 손자이고 승지 주서(胄瑞)의 아들이다.
초명은 만혁(萬赫)이었으나 임금(현종)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자는 시중(施中)이고 호는 한한당(閒
閒堂)이다. 10세에 학당에 들어갈 만큼 명민하였으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1671년(현종 12)에 현종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의 배우자로 간택되어 신안위(新安尉)로 봉해졌으나 모친 홍(洪)씨의 상을 당하여
혼인이 미루어진 사이에, 이듬해에 공주가 천연두로 세상을 뜨게되자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의
건의로 봉작이 환수되었다. 1677년에 유배지 장기(長耆)로 송시열을 찾아가 뵈었다.
24세 되던 1684년(숙종 10)에 식년 사마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했으나 1689년(숙종 15)의 기
사사화(기사환국-남인이 주도했고 이때 송시열이 사사됨)에 실망하여 은둔과 유랑 생활을 하다가 갑술환
국 이후 다시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1696년(숙종 22)에 음직으로 내시교관·의금부도사·
사복시주부를 지냈다. 38세 때인 1698년(숙종 24) 춘당대별시(春塘臺別試)에서 병과(丙科) 1등으로 합격
하였다. 그 후 지평·정언 등 여러 언관직을 거쳐 1702년에 사서ㆍ문학을 역임했다. 이듬해인 1703년(숙
종 29) 10월에 강원도 감진어사(監賑御史)로 임명되어 흉년으로 기근이 든 영서지방의 백성들을 진휼하
였다. 1704년(숙종 30)에 사간ㆍ동부승지ㆍ황해도관찰사ㆍ수원부사를 거쳐 대사간에 올랐으며 1708년
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이듬해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나 그 다음 해에 51세에 병환으로 아깝게 세
상을 떴다. 그는 선정으로 명성이 높았고 지리에도 능통했다. 또한 글씨도 잘 썼는데 특히 안진경(顔眞卿)
과 유공권(柳公權)의 서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묘는 천안시 광덕면 보산원 개천동에 있다.
[31] 맹사성
孟思誠
<1360(고려 공민왕 9년) ~ 1438(세종 20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명재상·청백리(淸白吏)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신창
맹씨 중시조인 이부 전서(典書) 의(儀)의 증손이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두문동 72현 유(裕)의 손자
다. 신창맹씨 온양 입향조로서 고려 말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희도(希道)와 어머니 흥양(興陽)
조(趙)씨의 맏아들이며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그는 개경(개성)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 희도가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어머니가 태양을 삼키는 태
몽을 꾸고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인근에 살던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이 낮잠을 자다가 용이 배나
무를 타고 승천하려고 하는 꿈을 꾸다 깨어 마침 그 배나무에 올라가 있던 다섯 살의 사성을 봤고, 그가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할아버지 유(裕)에게 그 얘기를 했던 것으로 인연이 시작되어 최
영의 손녀 사위가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가 10세 때 극진히 간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진력하여 생진과(生進科)를 통과하고 27세 되던 1386년(우왕 12)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춘추관 검열을 시작으로 사인·우헌납 등의 벼슬을 역임하다가 할아버지 유(裕)가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아버지 희도와 함께 서천 한산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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