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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book.cnkccf.or.kr:8800/file/20081126_153424/page/1/24_1227681606_71/M.jpg)
가재돌 : 안골 안에 있는 골짜기.
은 골 : 토정 이지함이 은과 금이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는 골
뒷 골 : 돗질 마을의 뒤에 있다.
용 추골 : 돗질 뒤편의 골짜기.
소나무 골 : 돗질돌이의 맞은편 골짜기.
당 골 : 성내 저수지에서 돗질로 올라가다가 있는 골짜기.
시계자리 : 시계를 파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장 터 : 오앗고개 남쪽에 장이 섰었다고 한다.
북당골절사지 : 강한걸씨의 조모님께서 북당골 지점에 불상이 있는 꿈을 꾼 후 찾아가서 땅
을 파헤쳐 보니 불상이 나오기에 절을 세워 운영하다 만영씨 모친께서 이어 받아 운영하다
가 수십년전에 유실되었다.
쇠재사지 : 조선시대의 사지
성내저수지 : 성내리에 있는 저수지, 1958년에 준공되었다. 몽리 넓이 245점이 된다.
안 골 : 성내리에서 가장 큰 마을. 음봉면 산정리 배타고개 북동쪽 곧 금산 북쪽안에 있으
며, 옛주춧돌, 기와 조각이 남아 있는데 음봉고을의 터라고 전해오나 실지로는 황촌부곡의
터라 함.
돗 실 :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
서촌말 : 쇠재 옆에 잇는 마을.
쇠 재 : 금산 밑에 금산 밑에 잇는 마을 질그릇점이 있었음.
개밋들 : 안골 앞에 있는 들.
불당골 : 안골 앞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음.
사정이 고개 : 돗실에서 음봉면 사정이로 넘어가는 고개.
요란고개 : 돗실과 쇠재에서 음봉면 요란으로 넘어가는 고개
장골고개 : 돗실에서 음봉면 요란으로 넘어가는 고개
안골사지 :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안골 뒷산에 있다.
성내리 산성 : 성내리 뒷족산에 축조 되어 있다.약410m에 이른다.
와요지 :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와요지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은거하였다고 한다. 쇠재마을
능선 말단부에 있으며 기와 파편등이 발견되었다.
7)
전 설
고용산
영인면 성내리 신봉리 경계에 '고용 이란
산이 있다. 높이는 약 300m에 이르며 초목은 없고
큰 돌만 많이 쌓여 있는 산봉우리가 들가운데 높이 솟아서 사방을 내려다 볼수 있다. 병자
호란때 이 지방 남녀들이 모두 이산에 올라와 피난을 하는데 적병들이 사방에서 봉우리를
에워싸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공격해오는 적병을 향하여 돌을 내리쳐서
완전히 물리
그 당시 안산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는 태평가를 구가 하였으므로 그 마을 사람
들의 칭송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평온한 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하루는 심심하여 통인을 데
리고 고용산에 올랐다. 그리고 산의 경치를 즐긴 뒤 통인을 시켜 여러 바위를 두드리게 했
다. 그랬더니 그중의 한 돌속에 금과 은이 가득차 있는지라 통인은 무척 놀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통인은 그 재물은 차지하기 위해 토정을 없
앨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날 토정이 생지네즙을 먹고 생률을 먹어서 지네
독을 제거 하는 것을 통인은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기회로 여겨 토정이 생지네즙을 마신후
버드나무를 생률처럼 하여 먹게 하였다. 그 순간 통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토인은 이때다 싶어 산으로 기어 올라 갔다. 그리고 전날의 그 바위를 찾기
위해 돌이란 돌은 모두 깨쳤다. 그리하여 간신히 찾은 바위속에는 금은 보화대신 돌로 가득
차 있었다. 기진맥진한 통인은 그 자리에서 숨을 가누지 못하고 자신이 깨놓은 돌이 구르는
은 골 : 토정 이지함이 은과 금이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는 골
뒷 골 : 돗질 마을의 뒤에 있다.
용 추골 : 돗질 뒤편의 골짜기.
소나무 골 : 돗질돌이의 맞은편 골짜기.
당 골 : 성내 저수지에서 돗질로 올라가다가 있는 골짜기.
시계자리 : 시계를 파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장 터 : 오앗고개 남쪽에 장이 섰었다고 한다.
북당골절사지 : 강한걸씨의 조모님께서 북당골 지점에 불상이 있는 꿈을 꾼 후 찾아가서 땅
을 파헤쳐 보니 불상이 나오기에 절을 세워 운영하다 만영씨 모친께서 이어 받아 운영하다
가 수십년전에 유실되었다.
쇠재사지 : 조선시대의 사지
성내저수지 : 성내리에 있는 저수지, 1958년에 준공되었다. 몽리 넓이 245점이 된다.
안 골 : 성내리에서 가장 큰 마을. 음봉면 산정리 배타고개 북동쪽 곧 금산 북쪽안에 있으
며, 옛주춧돌, 기와 조각이 남아 있는데 음봉고을의 터라고 전해오나 실지로는 황촌부곡의
터라 함.
돗 실 :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
서촌말 : 쇠재 옆에 잇는 마을.
쇠 재 : 금산 밑에 금산 밑에 잇는 마을 질그릇점이 있었음.
개밋들 : 안골 앞에 있는 들.
불당골 : 안골 앞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음.
사정이 고개 : 돗실에서 음봉면 사정이로 넘어가는 고개.
요란고개 : 돗실과 쇠재에서 음봉면 요란으로 넘어가는 고개
장골고개 : 돗실에서 음봉면 요란으로 넘어가는 고개
안골사지 :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안골 뒷산에 있다.
성내리 산성 : 성내리 뒷족산에 축조 되어 있다.약410m에 이른다.
와요지 :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와요지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은거하였다고 한다. 쇠재마을
능선 말단부에 있으며 기와 파편등이 발견되었다.
7)
전 설
고용산
영인면 성내리 신봉리 경계에 '고용 이란
산이 있다. 높이는 약 300m에 이르며 초목은 없고
큰 돌만 많이 쌓여 있는 산봉우리가 들가운데 높이 솟아서 사방을 내려다 볼수 있다. 병자
호란때 이 지방 남녀들이 모두 이산에 올라와 피난을 하는데 적병들이 사방에서 봉우리를
에워싸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공격해오는 적병을 향하여 돌을 내리쳐서
완전히 물리
그 당시 안산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는 태평가를 구가 하였으므로 그 마을 사람
들의 칭송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평온한 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하루는 심심하여 통인을 데
리고 고용산에 올랐다. 그리고 산의 경치를 즐긴 뒤 통인을 시켜 여러 바위를 두드리게 했
다. 그랬더니 그중의 한 돌속에 금과 은이 가득차 있는지라 통인은 무척 놀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통인은 그 재물은 차지하기 위해 토정을 없
앨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날 토정이 생지네즙을 먹고 생률을 먹어서 지네
독을 제거 하는 것을 통인은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기회로 여겨 토정이 생지네즙을 마신후
버드나무를 생률처럼 하여 먹게 하였다. 그 순간 통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토인은 이때다 싶어 산으로 기어 올라 갔다. 그리고 전날의 그 바위를 찾기
위해 돌이란 돌은 모두 깨쳤다. 그리하여 간신히 찾은 바위속에는 금은 보화대신 돌로 가득
차 있었다. 기진맥진한 통인은 그 자리에서 숨을 가누지 못하고 자신이 깨놓은 돌이 구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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