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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다. 또한 큰 뜻을 품더니 자라나면서 활을 쏘는 재주가 남보
다 뛰어났다. 선조 9년인 1576년에 무과 시험에 급제하였다. 첫 벼슬로 변방에 나
가 여러 번 공을 세움에 모든 사람들이 대장 재목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에 천거하여 특채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
羅左道 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이때는 왜인들은 우리나라를 치겠다고 떠들어 사이
가 벌어진 즈음이었다. 충무는 이를 매우 걱정하며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병
기를 다듬으며 접전하고 수비할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특별히 배를 창제했는데 그
모양이 엎드린 거북을 닮았다하여 거북선이라 불렀다. 해전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것을 옛날 고대 중국에 있었던 전선(戰船) 몽충(蒙衝)에 비교하기도 했다. 임진년
(1592년)에 왜적들이 대규모로 쳐들어 왔다. 부산(釜山) 동래(東來)를 함락시키고
여러 길로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갔다. 충무는 곧 군사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달려
가 적선 이십여 척에 불을 지르고, 경상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 원균(元均)과
노량(露梁)에서 만나 적을 협공했다. 사천에 이르러서는 왜선 20여 척을 불태웠다.
당포(唐布)로 나아가서는 적선 20여 척을 만나 괴수를 죽이고 졸도들을 무찔렀다.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당항포(唐項浦)에
서 군사를 합하여 적의 괴수가 탄 3층 배를 깨뜨리고 한산도(閑山島)까지 꾀어내어
또 다시 크고 작은 배 70여 척을 무찔렀다. 싸움에 져서 도망치는 왜군을 쫓아 안골
포(安骨浦)에 이르러 사십여 척의 배에 불을 질러 깨뜨렸다. 소문이 널리 퍼져 적이
무서워 떨었다. 이 승첩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정헌(正憲:정 2품계)으로 계급을 승
진시켰다. 그 다음 해인 계사(癸巳)년에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
水軍統制使)의 제도를 신설했다. 이순신은 본직을 가진 채 겸임하게 되어 진을 한산
도로 옮겼다. 이때 원균은 절제 받는 것을 부끄러이 생각하여 자주 헛소문을 퍼트렸
다. 대신들과 밀약하여 충무(忠武)를 적과 싸우지 않고 머뭇거렸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히게 했다.
원균이 그 직책을 대신하였다. 두어 달 만에 우리 군사는 패하고 원균은 달아나다
죽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충무를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충무는 수십 명의 부하
와 함께 말을 타고 순천부(順天府)로 달려갔다. 병선 10여 척을 얻고 여러 군데에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었다. 난도(蘭島)에서 적을 무찌르고 벽파정(碧波亭)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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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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