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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원진흥법’제정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2년여의 고심 끝에 마련된 초안이 정부에 제출
되어 문화원이 임의 단체에서 사회단체화(5.16후)되고 문화원진흥법에 의거하여 비영리공익문화사업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한국문화원연합회 충청남도지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충청
남도문화예술인 대회를 창설하여 문화예술인들이 예술활동에 대한 결과분석과 도내 예술인들간의
만남의 장을 통한 교류활동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김 회장은 서산문화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일을 했지만 그 중에서 제일 보람 있는 일을 한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민속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우리지역의 문화상을 체계화하는 사업을 진행하여 서산
민속지와 서산태안문화유적지를 간행한 일이고 또한 1992년 유네스코 주최 전국문화원 간행물 평가
에서‘스산의 숨결’
이 대상을 수상한 일입니다. 이들 간행물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미국 하버드대학,
중국 연변대학 등에 소장되어 우리지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역대표축제의 개발과 활성화입니다. 1987년 실시된 제1회 서산문화제는 주한 외교사절이
40여명이 참석하는 등 대내외로 주목을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어요. 그런데 격년제로 치러지고
게다가 시·군이 분리되고 지지부진하였죠. 당시 정부는 유사성축제는 통합하고 축제를 특성화하는
시책을 펴기 시작했죠. 그래서 서산에 맞는 축제가 무엇인가 고민끝에 배재대에 용역을 의뢰 2년여의
연구결과 탄생한것이‘해미읍성역사체험축제’
입니다. 체험이 있는 축제는 이 축제가 전국 최초였습
니다. 그래서 2년차에는 전국에서 12개를 뽑는 민속대표축제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이런 축제가
요즘 이름도 바뀌고 계속 특색 있게 발전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번째는 문화활동을 하자면 공간이 필요한데 서산문화원은 문화공간이 없었죠. 원사와 함께 지역
문화유물을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흡족하진 않지만 문화원사를 마련하여 전국최초로 지역문화학교(향토학교)를 만들어 지역민에게
다양한 문화활동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고 문화해설사 교육을 실시하여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 문화원은 여러 가지 차이가 심했어요. 예를 들면 서울 강남의 문화원은 경제적으로 풍족
하고 중심권에서 가까이 있는데 우리 농촌문화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설치된 것이 전국
최초의 문화원 분원입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읍·면에 분원을 설치 전시, 세미나 등을 순회하며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문화활동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는데서 착안하여
회원확대운동을 실시, 1,380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문화원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공이 인정되었는지는 몰라도 2001년 전국최우수 문화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박물관은 짓지 못했지만
부족한대로 문화원 3층에 향토사료관을 만들어 백제시대 유물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김 회장은 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열거할 수 없는 업적을 남기고 떠났다.
“전국 회의에 가면 서산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 없어 내 자신이 위축되었어요. 인근 아산에는
이충무공이 있어 그분을 선양하고 전국에서 관광객이 오는데 서산에는 없잖아요.”
그러던 차에 금헌 류방택 선생을 알게되어 금헌 선생을 현창하는 일에 매달렸다. 장영실, 홍대용은
알아도 우리나라 천문우주과학의 선도자였던 금헌 류방택 선생은 잘 모르고 있었다.
2011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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