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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유(淸儒)의 신저(新著)의 풍부(豊富)한 수장(收藏)과 함께한 자재(自
在)한 활용(活用)과에 이르러서는 완전(完全)히 완당의 단장(壇場)이
며, 어떤 사람의 추수(追隨)도 허락하지 않았다. 참으로 볼 때 그를
가도간의 석학(碩學) 홍유(鴻儒)의 세계에 있어서도 고○웅시(顧○雄
視), 치빙고상(馳騁?翔), 작연(綽然)해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事實) 완당(阮堂)만큼 청유(淸儒)에서 탄위경모(歎?敬慕)하게 한 동
인(東人)은 없었다. 고아(高雅) 발속(拔俗) 천고(千古)의 동인(東人)을
벗어난 동인(東人)이었다. 완당은 71세의 생애 중에 잘 생각하고 잘
썼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저서(著書)를 잘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술작(述作)을 가지고 엄정(嚴正)한 시간으로서 준
열(浚烈)한 비판(批判)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작물(作物)에 대해서도 극히 예리한 내관(內觀)을 가지고 있었
다. 일부러 서(書)를 쓰고 억지로 이를 세상(世相)에게 평가를 받는
것처럼 하는 것은 그가 예민(銳敏)한 학자적(學者的) 양심(良心)이 쉽
게 용서하지 못했다.
“작은 인물의 ‘자칭(自稱)’이 평상시에서의 저술(著述)을 가지고 자
기 스스로 생각하고 싶으면 이러한 문자(文字) 변천고(便千稿, 원고를
남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장부초(醬?醋) 자구(薺俱)에 불가(不可)
라는 것은 없다. 즉 명(命)해서 차거(?去)할 심도(心禱)를 이기지 못
하고”라고는 완당(阮堂)이 심우(心友) 권이제(權彛齊)에게 그 성운변
(聲?辨)을 선물했을 때의 말이었다. 그는 루루(屢屢, 여러 가지) 수
고(手稿)를 일괄(一括)로 불살랐다는 것도 전해졌던 것이다.
오로지 가장 완당(阮堂)을 경모(敬慕)하여 완당(阮堂)을 연구하려고
한 예(禮) 있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극(極)히 많았다. 문제
238 예산군지(1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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