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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박인우(朴麟祐)(1338~1410)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지만 ‘한 나
라에 두 임금을 섬
길수없다’며불사
이군 절의정신으로
고려왕조를 끝까지
섬긴충절인이다.
창절사 (예산읍 간양리)
창절사 춘향제
공(公)은 호가 초
암(草菴)이고밀성박씨중조인밀성대군언침의후손으로삼사좌윤공을재(乙材)의6대손이
다.판사(判事)를엮임한천응(天應)과 죽산안씨사이의둘째다.어려서부터천성이총명하고
강직하였다.일찍이문효공(文孝公)가정(稼亭)이곡(李穀)선생에게수학하여문예가일찍성
취되었고포은정몽주(鄭夢周),야은길재(吉再)두선생과종유했다.
여말에문·무과거에모두합격하고행직은양광도병마절제사(楊廣道兵馬節制使)봉익대부전
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이다.
내포지역이최영장군의출생지라서그런지더욱기승을부린왜구침략이1360년대부터 본격
화되어공주를비롯한내포일대가점령당하자고려조정은군사를총동원하여왜구소탕작전에
나섰다.1376년공(公)은최영의수하장수로최영과함께왜구의거점인홍산전투에참여하여
대승을거두고,예산덕산면천일대의왜구토벌에혁혁한공을세운다.
그러나이성계가위화도회군후최영장군을처형시키자점차나라의통치가혼란하고날로그
르쳐감을보고간하다가듣지않음으로물러와은거하였다.
고려왕권이무력화되고여러차례격변을격는동안조정은왜구퇴치를위해일본에보빙(報
聘)을파견하는등외교책을힘썼지만왜구의노략은끊이지않았다.
때마침 왜구가 전국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아 나라의 큰 위협이 되자 조정에서 의논이 “공
(公)이아니면능히왜구를토벌하지못한다”하므로공양왕원년(1389)10월다시일어나양
광좌우도수군도만호(楊廣左右道水軍都萬戶)가되어왜적을모두토벌하였다.
공(公)은또한바닷가침탈지역일반양인들의생활이극도로피폐해지자이들이부담하여야
할토지조세를받지않고수군의처자를양육하는위민정책을폈다.
공(公)의기록이전해지는[고려사권제83,32장앞쪽,지37병3선군]의내용을살펴보면
공양왕원년10월에박인우로양광좌우도수군도만호를삼고하교하기를,“도내의병선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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