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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강화유수부 터, 프랑스군의 파괴?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군
약탈로 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몽골침략기에는 궁궐로 사용된 곳
강화군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이다. 그래서 고려궁지 궁터라고 불린다.
미국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일류로 떠올랐고, 서유럽은 아편전쟁 이후인 19세기 중반
부터 세계 일류로 부상했다. 그 이전에는 이류에 불과했다. 그들이 이류였을 때는, 동아시아가
적어도 국제통상 측면에서는 세계 일류였다. 경제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리오리엔트」
에서 1545년 이후부터 1800년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13만 7천 톤의 은( )
중에서 6만 톤이 중국에 유입되었다고 했다. 44%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에는 은이
국제화폐였기 때문에, 은의 유입은 곧 무역수지 흑자였다. 중국이 오랫동안 흑자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차?비단?도자기라는 3대 수출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효자종목’
을 바탕으로
중국은‘은의 블랙홀’
이라 할 정도로 세계의 은을 빨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 등 서유럽은
만성적인 대( )중국 무역적자에 시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유럽이 마땅한 수출품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아편을 뿌려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적자를 만회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조선과 청나라가 서유럽과의 관계를 주저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역량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청나라는 자국이
세계무역의 중심이기에 서유럽을 무시했던 것이고, 조선은 청나라를 확실히 붙잡고 있었기에 굳이
딴 데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일찌감치 서유럽에 눈을 돌린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적어도 통상관계에서만큼은 동아시아가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당시의 서유럽 사람들에게는 동아시아에 관한 지식이 아주 절실하고 긴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아시아 서적을 열심히 번역하고 또 번역했다. 도널드 라크와 에드윈 클레이가 1965년에 쓴
「유럽을 만든 아시아」
에 따르면 16~17세기에는 수백 권의 아시아 서적이 유럽인 선교사?
상인?선장?선원?의사?군인?여행가 등에 의해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 시어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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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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