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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영(靈)과 배(
) 등 2남1녀 중 장남이다. 자는 집옥(執玉)이고 호는 백석당(白石堂)이다. 광
해군 4년(161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통훈대부로 석성현감을 지냈다. 집안의 족보에 의하면 1627년
(인조5년)에 정묘호란에 즈음하여 척화상소를 올려 임금(인조)이 가상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
고로 백부 김여물의 아들이 영의정 등 정승만 다섯 차례나 했던 승평부원군 북저(北渚) 김류(金
1571~1648)이고 그의 동갑내기 사촌이다.
그가 언제 어떤 연유로 염치에 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부인이 신녕윤씨(新寧尹氏)인 점으로
보아 혼인과 관련하여 인근 지역인 염치 서원리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신녕윤씨는 조선초
윤자임(尹自任, 1407~1478)이 영인 지역으로 내려 온 뒤 후손들 중 삼척부사 윤필은(尹弼殷,
1516~1586)과 강원부사‘아산8문장’윤지복(尹之復, 1569~1638) 부자가 당시에 인근에 있었기 때
문이다. 혼인 시기일 수도 있고 이후 병자호란 시기에 처가 지역으로 피난한 뒤 정착했을 수도 있다.
대략 370~420년 전이다. 아버지의 묘소는 고양 벽제에 있지만 어머니의 묘가 서원리 아기바위(어금
니바위) 아래에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살았고 입향 시기도 후자로 여
겨진다. 김영의 묘는 염치읍 서원리 기와내 서쪽 산줄기에 있다.
김영은 외아들 경승(慶承)만을 두었고 김경승은 딸 하나만을 낳았다. 그 딸은 신창 지역의 학자인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아들인 은일 학자 박유연(朴由淵)과 혼인하였다. 김경승은 효표(孝標)를
계자로 들였다. 김효표는 수득(壽得), 필득(必得) 등 2남5녀를 두었고 이후 점차 후손이 늘어 집안의 기
반을 넓혔다.
집안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림산(영인산 상투봉 아래) 일부를 사패지로 받았는데 이때 일부러
‘앞에는 백산(산이 없다), 뒤에는 석산(돌산)’
을 받았다고 한다. 집안에 재산이 많으면 공부를 안 하
기 때문에 그런 곳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21] 김녕김씨 김응남
| 金應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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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인물이며 김녕김씨(金寧金氏) 15세로 충의공파 아산시 권곡동 지역 입향조이다. 현재
권곡동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26세(世) 김세규(金世圭, 63세)씨의 11대조이다.
김응남은 세종 때의 충신으로 세조 즉위에 반대하고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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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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