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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맹계증
孟繼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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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으로 좌의정 사성(思誠)의 손자이고 감찰 귀미(歸美)의 아들이며 어
머니는 단양 이씨이다. 동지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효증(孝曾)의 아우이다. 부인은 안동 권(權)씨로 도총
제 방위(邦緯)의 딸이다. 아버지 귀미(歸美)는 좌의정 사성(思誠)의 외아들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로
재직 중에 태종의 부마 조대림(趙大臨) 심문 사건 때 사성과 함께 연좌로 고문을 당한 장독과 민(閔)씨 형
제 옥사에 장인(단산부원군 이무)이 연루되어 일시 옥고를 치룬 후유증으로 일찍(1406년, 태종 6, 추정)
세상을 떴다. 이런 일들로 그는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과 학식이 높아 선교랑(宣敎郞) 세자익
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세조 때에 아들(석흠)이 공신에 오르게 되자 공조참판에 추증
되고 1471년(성종 2)에 다시 그에 따라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 신원군(新原君)에 봉해졌다.
묘는 실전되었다. 1810년(순조 10)에 송악면 동화리 배골에 단(壇)을 세웠고 2005년에 온양 법곡동으로
옮겼다.
[29] 맹만시
孟萬始
<1636(인조 14년) ~ 1681(숙종 7년)>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로 본관은 신창이며 온양
에서 거주했다. 통정대부 세형(世衡)의 손자이고 통
덕랑 윤서(胤瑞)의 아들이다. 자는 원지(元之)이고
호는 백평(柏坪)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
니의 보살핌과 숙부 주서(胄瑞)의 도움으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효종6년(1655) 어명으로 사학(四
學) 유생에게 시제(試製)를 할 때 1등을 하여 회시
(會試-초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복시에 응시하는
일)를 명받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 진사시(進
士試)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에 곡성현감으로
부임했다. 이듬해에 큰 도적의 무리를 잡아 당상관
<맹만시의 묘>
통정대부로 승진했으며 당시 곡성현 관아의 정당(政
堂)인 노래당(勞萊堂)의 편액을 쓴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금천군수를 역임하여 문중에서 금천공(金
川公)으로 호칭한다.
서화(書畵)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특히 소를 즐겨 그렸다.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약에 섞어 드려서 쾌유하게 한 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모친상을 당하여 주변 사
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만 먹으며 슬피 울며 시묘를 하던 중 3년 상을 다 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두
었다. 노론의 영수 김수항(金壽恒)이 만사(輓詞)로써 그의 효를 칭찬했다.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배
골(서배골)에 있다. 교관을 지낸 종질 숙주(淑周)가 표문을 지은 묘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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