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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를 앞질러 단행하기 위하여
13
일 밤중에 동지
40
여명과 청양을 거쳐 홍주
洪州
를 공격하려 하였
으나 군비가 열세이어서 홍주의 헌병과 싸워도 승산이 희박하다는 각 의병장의 공론을 참작하고 홍산과
서천
舒川
비인
庇仁
의 동지들에게 궐기할 것을 연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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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새벽에 거점을 떠나 합천
合川
에 이르
렀을 때 일본 헌병과 마주쳐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의별들이 패함으로 그대로 의병을 이끌고 보령
의 청라
靑羅
에 이르렀을 때 연락을 받은 의병들이 호응하여 오므로 대부대가 되었으며 다시 남포
藍浦
보령
保寧
군수에게 병마와 군비의 제공을 명하는 한편 이 곳에서 일본인을 잡아서 포박하여 백
성에게 던져 처리를 맡기고 보령군수 신석구
申奭求
가 보낸 양총
洋銃
) 80
정으로 무장을 강화해가지고
홍주로 향하여 오후 시에 공격에 임하게 되었다 이때의 의병은 총기로 무장한
5
600
여명과 창과 칼로
무장한
200
여명으로 도합
800
여명이었다 이곳에서 맨주먹으로 따르는 유생
300
여명까지 합치면
1,100
이 참여한 의거로 창의군대장에는 민종식
閔宗植
참모장에는 정재호
鄭在鎬
황영수
黃英秀
였으며 뒤
에는 관군의 육군정위로 헌병대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정규무관으로서 관군의 군복을 벗은 이세영
(李世
이 맡았다 이어 선봉장에는 박영두
朴永斗
후봉장에 정해도
鄭海燾
유격장에 채경부
蔡敬敷
소모
召募將
에 최상집
崔相集
향관
餉官
에 박윤식
朴潤植
운량관
運糧官
에 박제현
朴濟賢
성재평
成載
참모에 이설
곽한일
郭漢一
유준근
兪濬根
채광묵
蔡光
김광우
金光佑
이용규
李容珪
이상구
李相龜
등이고 군사
軍師
에 김상덕
金相德
이었다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은 창의군
倡義軍
이라 했는데 창의군은 대포 문을 앞세우고 공격을 시작하여
6
남산을 점령하고 읍내로 돌입하자 성내에 있던 왜인
倭人
들이 처음에는 저항하는 듯 하였으나 대세에
눌려 덕산
德山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홍주를 점거한 창의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준비를 서둘렀다 홍주가 점거되자 공주에
있는 왜경과 헌병대에서는 왜경 경무
警務
가 이끄는 경찰이 달려왔고 수원의 헌병대에서는 왜군들이
달려와서 창의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여 예산으로 달아났으며 월
5
21
일에는 경부
警部
가 이끄는 왜
경과 한국경무관
警務官
이 한국경찰은 증원하여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이어 정부에서는 공주 전주의
진위대
鎭衛隊
에게 출동을 명령하니 공주진위대의 정령
正領
이기홍
李起泓
이 군사
100
여명으로 공격
준비를 서두르고 전주진위대에서도 중대장 유기선
劉基善
이 소대장 김홍식
金弘植
과 함께 군사를 이끌
고 와서 시간동안 혈전을 벌였으나 홍주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4
28
일에는 일본군 보병의 주력부
대를 아산군 신창에 진주시키고 밤에는 기병대를 신례원에 진주시켰다 그리고
30
일에는 왜군이 홍주에
진격하여 홍주성을 포위하고 그날
11
40
분경부터는 기관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으나 의병들이 혈전
으로 막아내어 왜군은 시체만 남기고 후퇴하였으며 창의군이 계속하여 홍주성을 지키자 이번에는 해미
성을 치러가던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출신 의병장 곽한일
郭漢一
과 중군 남규진
南奎振
이 이끄는 예산
의병
400
여명이 합세하므로 의병의 사기는 더욱 중천하였다
31
일 오전 시
2
30
분 왜군은 서문밖의 민가에 횃불을 던져 방화를 하며 의병들의 시선이 쏠리게 하고는
동문쪽으로 기관총 난사하며 쳐들어 왔고 의병들이 그쪽으로 몰리자 다시 한패가 서문으로 쳐들어왔고
읍내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끝까지 싸운 의병의 일부는 남문을 통해서 덕산쪽으로 밀려갔
으며 성내에 있었던 의병은 끝내 싸워 군사 김상덕
金相德
이 전사하고
83
명의 의병이 순국하였다하나
그 시신으로 보아 기백이 넘었다 또한 이곳에서 왜군에게 잡힌 의병은
145
명으로서 그중
79
명은 한양
으로 압송되어 일본 헌병대에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항쟁하는 기상은 변함이 없었다.
홍주성이 함락되자 민종식
閔宗植
은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의 전 참판 이남규
李南珪
의 집에 은신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서 교수형
絞首刑
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진도
珍島
로 유배되었다
창의군의 참모장 이세영
李世永
은 이순신의 후예로서 체포되어 종신 유형을 선고받고 황주
黃州
로 유
배되었으나 뒤에 만주로 건너가서 신흥학교
新興學校
교장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였
으며 그 밖의 박윤식 곽한일 김덕진 등 참모들은 종신 유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창의대장 민종식
을 숨겨 줬던 이남규는 뒤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압송하는 도중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역말 강변에
일본 헌병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으며 아들 이충구
李忠九
와 몸종 김웅길
金雄吉
도 그들에게 참살을 당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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