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44페이지

229페이지 본문시작

천수만의풍부한어족자원이만들어낸어로문화 ?227
가 많으면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지가 없는 주민들은 모두
부잣집에서 품을 팔아 생활했다. 이 마을로부터 2㎞ 떨어진 강당리에서 주로
품을팔았다.그곳은농지가많아품을팔기가가장용이했다.
◆봉락리2리노라포
봉락리는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중 2리는 총 86호로 전 주민이 어
업에 종사했다. 다른 마을과 달리 유독 이 마을에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데,
36개의 성씨가 함께 거주하고 있다. 노라포라는 지명이 중국인이 낙향해서 살
았기에 낙양동이라 불렀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특히 이곳은
개펄이 넓고 좋은 어항포구로 어업조건이 특별히 좋았기에 땅이 없는 사람들
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누구든 들어와 어업에 종사하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실제 방조제 건립 이전에는 어족자원이 넉넉하고, 개펄이 5㎞ 정도 넓게 펼쳐
저있어맨손어업을하기에최적의조건이었기때문이다.
이 마을 앞의 천수만은 육수가 넉넉히 흘러 육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산란을 하는 고기어종이 많이 있었기에 고기가 매우 흔했다. 서해안에서 나는
모든 고기는 이곳을 거쳐 갔기에 어종은 가짓수를 일일이 셀 수가 없었는데, 가
오리, 상어, 민어 등의 큰 고기를 주로 잡았으며, 개펄에서는 바지락, 소라, 주
꾸미, 오징어, 황새바치[꽁치새끼], 학꽁치, 장어 등을 잡았다. 장어는 한 번 잡으
면몇관씩잡았다.이를두고주민들은“물반고기반”이라표현한다.
이웃마을 배들이 들어와 소라와 바지락을 캐서 한 배씩 가져가기도 했다. 음
력4~5월에는줄만매달아두면없던성이하나씩생겼을정도이다.
노라포에는 5~6척의 중선이 정박했는데, 물이 많이 빠지면 이곳에는 배를 댈
수 없으므로 수심이 보다 깊은 대두리나 갈마리 마을 앞으로 배를 댔다. 이곳은
모두 취평장 인근의 포구이므로 이곳에 배를 대야 취평장(4·9일)을 보기가 용이
하다.어물을팔고필요한물건을구입해돌아갔다.

229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