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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는 다른 섬에 비해 논과 밭이 많아 외지에서 곡물이 들어오지 않아도 먹고살 만 하



였다. 그렇지만 호도 사람들이 쟁기질을 할 줄 몰라 육지에서 쟁기질하는 사람이 들어와 모

?

든 논밭을 갈아주었다. 녹도와 외연도의 경우 농기구로 따비를 사용했는데 호도에서는 사
용하지않았다.쟁기와쇠스랑으로땅을팠다.
호도는 마을과 농경지가 분리되어 있었고, 마을은 포구 주변에 빽빽하게 들어섰기 때문
에 추수하여 말리고 쌓아 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 거름마당이라고 불리는 공동의
마당을 2개 만들어 벼와 보리를 추수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농작물은 벼, 보리, 밀, 수
수,조,고구마등이었다.
호도에서는 어업으로 홍어잡이가 흥했다. 한 집에서 시작하니까 여럿이 따라서 했다. 홍
어잡이를위해이른봄에어청도를거쳐흑산도로가서조업했다.흑산도밖에서홍어를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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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김명율님의 남동생도 죽었다. 호도에는 사람이 많이 죽었으나
묘지가없다.모두바다에서죽어시신을찾지못했기때문이다.남편을잃은부인들은아이
들과어렵게살았다.
호도에는 김이 많아 음력 3월부터 김을 뜯어 팔아 생활하였다. 김은 미끄러워 뜯기가 어
려워 재를 바르면 쉽게 뜯을 수 있었다. 뜯어온 김은 김칼로 조숴 발장에 떠서 말렸다. 하루
에한바구니또는두바구니가채워졌다.
김은 광천장이나 대천장에 팔았다. 호도에는 장배가 없어 장에 가려면 뎀마를 타고 녹도
에 가서 장배로 갈아탔다. 장에는 하루에 다녀오지 못하고 장 전날 갔다가 장날 돌아왔다.
대천이나광천독배에는잠자고밥먹는집이있었다.장에는주로여자들이다녔다.
호도에는 바지락은 없고 굴은 많았다. 그러나 굴을 팔지는 못했다. 굴을 따다 먼 광천장
이나대천장에까지가져가팔수가없었기때문이다.많아도먹기만했다.
호도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녀들이 와서 살았다. 호도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해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녀들은 배에서 먹고자고 하다 정 추우면 호도 가정집
으로 들어오고 그렇지 않으면 배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스슥(조)을 한 포대씩
가져와서먹었고,반찬으로는된장을가져와서먹었다.
당시 안흥 사람 유중식이라는 사람이 해녀들을 고용해 해삼을 잡아 호도에서 삶아 말려
팔아 큰 돈을 벌었다. 이후 호도 사람들도 해녀사업을 하였고, 호도에 온 해녀들은 호도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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