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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 등을 하며 생활하였다. 학교는 광명초등학교를 다녔으나 마지막 사친회비를 내지
못하여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스물한 살에 원산도 처녀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
아 길러 모두 출가시켰다. 당시 마을 이장으로 가족계획 요원이었기 때문에 아들딸 가리
지않고둘만낳기운동에솔선했다.
그의 어머니는 선촌에서 중선배가 들어오면 생선을 받아 안면도에 가서 팔았다. 그 시
절안면도와원산도사이에는나룻배가있어다닐수있었다.중선배에서생선을받아가
지고 안면도에 가서 곡식과 바꾸어 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생선을 이고 가서 팔고, 곡
식으로 받아 이고 왔다. 이런 생활로 5남매를 양육하였다. 생선 값은 주로 일로 해 주었
다.중선배를부리는집에가서생선값대신일을해주는것이었다.원산도선촌너머,염
전 있는 곳에는 일제강점기에 뚝은 만들었지만, 논으로 만들지 못한 황무지가 있었다.
이 황무지를 안성길의 형들이 5마지기나 개간하였다. 갈대가 난 갯벌을 파서 둑을 쌓고
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든 논은 오래 두면 염기가 빠져 농사지을 수 있었다. 이
논들은나중에국유지가되었고,농사짓는사람들이모두불하받았다.
원산도에는옛날부터주벅이많았다.그주벅에청어가많이잡혔다.청어가얼마나많
았는지,그물이터져도다나가지못하고남은것을잡았을정도였다고한다.원산도는1
개의법정리이지만과거부터3개의행정리로분구되었다.1리는선촌과진구지이고,2리
는 점촌, 저두, 개경, 3리는 풋살, 짐말, 사창 마을이다. 이장도 다르고 어촌계도 따로 한
다.원산도는하천이없어모두하늘만바라보는천봉지기였다.옛날에비가오지않으면
초복 때까지 모를 심었는데, 물이 없으면 작대기로 구멍을 뚫고 심었다. 꼬챙이모라고 하
였다.초복때심어도그후에비가오면1마지기에1섬은먹을수있었다.이것을원산도
에서는 ‘대석’이라고 하였다. 날이 가물면 못자리가 문제였다. 못자리가 말라 타 죽으면,
밤새워 샘물을 받아다 못자리에 뿌려주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한테는 욕먹을 일이었
다.먹는물도부족했기때문이다.
원산도의 부잣집은 대개 논 20여 마지기를 지었다. 또 밭도 많았고 머슴도 두었다. 일
소를 세워 논을 갈았고, 남의 논을 갈아주고 대신 품으로 받아 일을 하였다. 소를 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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