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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논산의교육발전
회에서 급하게 『조선어독본』이라는 교과서 한 권을 만들었다. 그것도 학교마다 공급해줄
수 없어 도에서 한 권씩 등사해서 각 학교로 주면 학교에서 다시 그 교과서를 등사해서 학
생들을가르쳤다.
그래도 해방되고 5~6년 후에는 제도가 많이 정비 되어 1면에 1교를 두는 정책이 시행되
었다. 지금과 다른 것이 또 있다면 당시에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교에 다니겠다고 오는
아이들의 나이나 실력이 개인마다 차이가 컸다. 독학으로 공부하거나 서당에 다니다가 학
교로온아이들도있었기때문에먼저시험을봤다.시험성적을보고실력에맞게학년을배
정했다.지금처럼일괄적으로모두1학년으로학교에입학하지는않았다.
끝까지지킨초등교육현장
구자곡국민학교에서 8년을 있을 무렵 6·25전쟁이 났다. 다행히 교사들에 대한 탄압은
없었다. 그만큼 교육을 중요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교사들 사이에서 좌익과 우
익이 분열되어 이념에 맞는 사람끼리 따로 모임도 했지만, 심각한 대립은 없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께 계속해갔다. 김 교장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이념보다 교육이 더 중요하
다고 생각해서 학생들 교육에만 집중했고 그건 4·19 혁명이나 5·16 군사정변 때도 마찬가
지였다.
구자곡국민학교 다음으로는 부창국민학교로 이동했다. 그다음부터는 논산의 여러 초등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동성학교에도 있었고 부여 규암에 있는 백강학교에 갔다가 다시 대
명학교로왔다.예산예동학교에서교장이되었다.
당시에는 교육현장의 행정절차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처럼 평교사, 교감, 교장 순
서대로 진급해가는 체계가 아니었다. 학교 형편에 따라 평교사가 교감 역할을 맡다가 다른
학교에가서다시평교사로근무하기도했었다.
예동학교에서 교장으로 5년간 근무를 하다가 다시 논산 성동학교로 왔다. 마지막에는
왕전초등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했는데 평교사로 15년, 교감으로 15년, 교장으로 15년을 근
무해서45년동안초등교육현장을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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