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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구자곡국민학교에서 여러 학교가 분리되어 나갔다. 1956년에는 왕암, 1959년에는 연무
대,1965년에는연무중앙,1972년에시묘학교가분리되었다.
일제강점기당시초등교육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교장이었다. 교장에게만 관사가 지급되었고 나머지 교사들은
각자 집에서 생활했다. 사회적으로도 지서장은 반드시 일본인이 맡았던 때였다. 교사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었다. 일본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오면 일본에서 월급 외에 보조
받는 별도의 금액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선생님으로 많이 왔다. 여선
생님들도많이있었는데남자들은일정한나이가되면전쟁에동원되었기때문이었다.당시
큰 학교에는 교장 다음에 현재 교감 역할을 하는 교두가 있었다. 배우는 과목도 지금처럼
교과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수신(윤리), 국어, 공민(사회), 산수, 음악, 미술 교과서가 있었고
체육은 교과서 없이 공부했다. 일본인들만 다니는 학교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논산에서도
반월학교가일본인들이다니는학교였는데나중에해방이되면서부창에흡수되었다.
해방후에변화된초등교육
해방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전부 제 나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을괴롭힌일본인을왜멀쩡히제나라로돌아가게했을까싶지만,당시우리나라사
람들은 순박했다. 그래서 기껏해야 괴롭힌 사람들의 짐을 빼앗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가니 당장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이 많이 부족했다. 교장의 빈 자리를 메우
기 위해 빨리 승진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선생님이 부족해서 일본 교사들이 가르치던 반을
한국교사들이나누어서맡았다.
교사들의 생활도 어려워졌다. 나라가 안정되지 않아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
달리는 교사들을 위해 학부형들이 자체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했다. 나락을 조금씩 거둬 월
급 대신 교사들에게 주었다. 그 나락을 팔아 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집안이튼튼한사람들은교사를그만두기도했다.
교과서도 일본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당장 가르칠 교과서가 없었다. 조선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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