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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돈을벌수있었다.주변에모시장이많이서서꾸리로삼아서도팔수있었다.어느댁은


,
모시팔아논도사고부자가된집도있었다.

?


한낮에더우면일손을멈추고시원한대문간에서모시를삼았다.모시를짤수있는사람

?

은많지않았다.


명절때면동네사람들이편물옷을맞추려고줄을섰다.특별한방한복이없었던시절에
?


내복 위에 실로 짠 편물 옷은 겨울 의복으로 인기가 많았다. 추석이 지나면 편물 옷을 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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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다. 제일모직에서 나오는 순모와 505(순모합성사)를 주문한 사람의 치수에 맞게 게이
지내서문양도넣고수작업으로짰다.제일모직의합성사는손으로짜는것보다올이곱고
어떤 디자인의 옷도 만들 수 있었다. 수공료는 성인 옷 한 벌에 2,000원 정도였다. 당시 공
무원월급이4,000원이었음을감안하면큰공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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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7월이 되면 먼 바다에서 은어가 돌아온다. 유난히 모래와 자갈이 많았던 웅천천에
는은어가많았다.노노리그물을치면하루저녁에300마리도잡았다.
은어는 젓국을 담아 삭혀서 단(대상포진)에 특효약으로 썼다. 대부분 젓국을 담았지만, 훈
제구이로만들어파는사람도있었다.
70년대 초반, 동네 사람이 처음으로 딸기 농사를 도입하여 짓게 되었다. 처음에는 딸기
농사를 독점하기 위해 모종을 버리면서도 보급하지 않았는데 인정 있으신 분이 다시 나누
어 주어 온 동네가 딸기 농사를 짓게 되었다. 서울로 나무상자에 담아 매일 같이 올려 보내
면 서울상회에서 돈이 내려왔다. 쌀농사에 비해 소득이 높았고 5월에 수확을 하면 모를 심
을수있었다.
성동리에서 수부리로 가려면 작은내를 건너 넓은 밀밭을 지나고 다시 큰내를 건너야 갈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동아건설이 들어와 수년간 밤낮으로 골재 채취를 하다 보니 너
른모래밭과소나무숲이사라졌다.지금은웅천천제방공사로옛모습이흔적도없다.
성동리 위뜸에는 고동집이 있었다. 자갈과 모래가 많았던 웅천천은 고동이 많았다. 저녁
이면 여럿이 줄을 맞춰 횃불에 의존해 고동을 잡았다. 밤새 잡은 고동은 큰 양동이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잡은 고동은 고동집에서 일괄 매입을 했다. 어린 학생들도 여름에
냇물에서 멱을 감으며 고동을 잡아서 고동집에 팔아 용돈을 벌었다. 고동집 아저씨가 철도
청에근무해서매입한고동을기차를타고대전으로가져가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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