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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꾼 기록 참조
인건배
무당. 1929년생. 예산군 덕산면 둔리 거주. 45세였던 1974년에 무당이 되어
유복열
80세인 2009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가 스스로의 무속 일판을 떠나고자 했는데 같
은 시기에 신기가 말라 굿을 행하지 못하게 되어 모든 무속인으로서 활동을 접고 한
가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의 아버지 유병철은 예산에서 일꾼(머슴)을 셋이나 두고 살아가는 부자였고, 양반
으로 살았다. 1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유복열은 18세에 청주한씨 문
중으로 출가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남편이 서울 금명고 과장으로 재직하는 등 유
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남편이 기이한 인연으로 사망하고 나서 가장이 되어 무속인
의 길을 걸어왔다.
유복열의 시 숙모가 무속인이었다. 시 숙모는 경기지역 선거리를 잘하는 무당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집안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 채 활동하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후 무당으로 사용하던 집기며 굿당의 모든 물품을 종교적인 차이가 있던 유복열의 남
편이 모두 불에 태웠고, 득병하여 3년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유복열은 남편 사망 후 바로 신기神氣가 왔으며, 시부모가 모두 사망한 후라서 집안
의 반대 없이 무속 일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신엄마는 홍성 광천 거주 큰 법사로 이
름이 높았던 서춘식이었다. 서춘식은 유복열의 재주와 신기를 높이 평가하여 처음부터
충청도 앉은굿(경)의 경문을 가르쳤다. 무속인으로서 유복열은 스승인 서춘식의 영향을
받아 신기도 좋고 법문도 좋은 법사로 알려졌다. 무당을 한지 6년 만에 수덕사 오르는
산자락(식당가에서 서쪽의 산속)에 법당을 차리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7일 큰 정을 읽
을 수 있는 여자 법사로 활동하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앉은굿(경)만을 행하였다.
첫 경문 공부를 하던 공책의 일부가 남아있으며 그 내용은 ‘천지팔양신주경’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이전의 향토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경기지방의 무속인들이
하는 동 경문과는 차이가 있다. 충청의 앉은경문으로 선거리가 없고 신장과 3개의 사
자만을 사용하는 전통의 방식을 고집하여 마지막 정까지 그 방법으로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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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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