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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순사들이었다고한다.한달에두번씩사그내를다녀오신다고하셨다.지금의집성당



을 가셨던 것 같다. 편찮으셨던 아버지였지만 천수답에 물을 대는 양수기도 놓으시고 마을

?

의큰일들을하시는마을의어른이셨다.그래서많은사람들이아버지께상의하러오셨다.
고종사촌 오빠가 공산당 당원으로 집안사람들을 공산당에 입당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온
가족의 만류로 입당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인민군들한테 쫓기던 마을 사람들을 모아 멀리
부여아미산골짜기외딴집에숨겨무사히6.25를넘겼다.
어머니가 행상으로 돈을 벌어 논을 사고 다시 방앗간을 지었다. 웅천에 2곳, 부여 반교에
2곳. 여러 곳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다 보니 집도 여러 곳에 있었다. 살림은 집집마다 올케들
이했고김인선씨는그집들을오가며심부름을했다.늦은시간에부여반교방앗간에심부
름을 가면 올 수가 없어 어두운 새벽에 길을 나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우릿티재(수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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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넘어올때면수부리사람들은지게를지고나무를하러올라오곤했다.
김인선씨의어머니는어려운사람들을많이구제해주셨다.인민군에쫓기는사람들을몰
래 숨겨주고 음식도 나누셨다. 방앗간을 하셨기에 어머니는 식사 때가 아니어도 집에 찾아
오는 모든 손님들을 위해 항상 밥상을 차리셨고,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시
래기나 나물을 넣어 밥의 양을 늘리셨다. 후에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쇠약해지실 때도 그때
의고마움으로어머니를찾아뵙는사람들이많았다.
김인선씨는 사촌 언니 중매로 성동리에 사는 임씨 성을 가진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큰아들이지만 시아버님의 배려로 결혼과 동시에 분가를 했다. 도시로 가서 편하게 살라는
아버님 명과는 달리 부모님 가까이서 살게 되었다. 수부국민학교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1녀 2남을 낳았다. 남편은 학교에서 부진한 학생을 하교 후 김인선
씨에게보내보충수업을하게했다.물론댓가가없는무상교육이었고,유난히제자들한테
애정이 많았던 남편은 붓글씨나 산수 공부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큰아이가 여섯 살쯤 되
었을때시아버님의갑작스런별세로시댁으로들어와살게되었다.
성동리에는집집마다모시삼고짜는집이많았다.봄이면모싯대가올라온다.거름을많
이 주면 모싯대가 굵고 키가 커진다. 모시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가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 가늘게 짼다. 그 가닥을 이어 꾸리로 만들어 다시 모시를 매고 짜면 필모시를 만들
수 있었다. 낮에는 농사 일을 하고 밤에 모시를 삼아 짜서 한 필 33자를 만들어 장에 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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