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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제를 뿌려 이를 잡아 주었고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신경도 써 주었다. 포로로 잡힌 후
그는 부산 마산을 거쳐 거제도에 수용되었다. 거제도에서는 먹는 것도 좋고 입는 것도
좋았으나 잠자리가 비좁았다. 한 천막 안에 50명이 잤는데 일시에 누워야 모두 잘 수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서 포로를 분류했다. 남으로 갈 사람은 가는데 특별히 생활에 대해
서 혜택을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산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 인공기를 걸어놓았는데
태극기보다 더 높게 걸어놓았다. 그리고 활동하는 데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
면사지를붙들어매고잡아다녀서죽였다.죽은시체는변기통에넣어버렸다.
그는 거제도에서 논산으로 이송되었고, 1953년 논산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미군은 감
시만 하고 있었는데 한국군이 문을 열어주고 나가라고 하였다. 이후 3명이 논산군 채운
면 용화리로 들어갔다. 당시 마을에서 살 방은 마련해 주었고 농사짓는 일을 해 주고 밥
을 얻어먹었다. 논산군 채운면 용화리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 1953년 8
월 한국군으로 입대하였다. 여느 한국군과 같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3사단 포병
대대로배속받아측지병으로일했다.
제대하고는 갈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부산으로 가려고 했었다. 부산에 가면 고향사
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후임으로 들어온 광천 출신의 강석희가 자기
집에 가서 일 좀 보아달라고 하였다. 자기가 군대에 와서 자기 집이 살기 어렵다는 것이
었다. 그래서 충청도로 가기로 하고, 제대해서 제일 먼저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기거했던
논산채운면의집으로갔다.가서가을일을해주고광천강석희집으로왔다.광천의강
석희 집은 살기가 어려웠다. 강석희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였고, 더구나 부인도 사망한
상황에서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내고 열댓 살 먹은 딸이 밥해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도저
히 함께 있을 형편이 안 되어 원산도에서 온 장사하는 사람에게 있을 곳을 소개해 달라
고했더니원산도의양조장을소개해주었다.그래서1957년부터원산도양조장에서일
하게되었다.
김명희의 어머니는 병약하고, 아들이 어리기에 박만곤을 사위 겸 아들로 얻으려고 딸
에게결혼하기를강요하였다.김명희는스무살,박만곤은서른한살이었다.
220 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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