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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곤의 처 김명희(金明嬉)는 1942년 원산도 선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결핵을 앓다가 1956년쯤 사망하였다. 당시 병약한 어머니와 15세 된
그녀, 그리고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김명희는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퇴하
였다.집에서어머니의병구완을하고산에가서나무를해다때었다.20세때인1961년
원산도양조장에서일하던박만곤과혼인하였다.
6·25날은 새벽에 비가 내렸다. 포성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훈련하는 줄 알았는데, 아
침이 되니까 한국군들 포로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포로들 중 부상이 심하여 움직
이기 어려운 사람들은 부대에서 사살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인민군이라도 부상이 심
하여 살아날 가망이 없으면 사살하였다. 그는 임진강을 건너 의정부를 거쳐 서울 남산
의방송국에배치되었다.
서울 방송국에 배치되어 있을 때, 북한에서 유명한 정예부대인 4사단 18연대로 배속
받아 위생병이 되었다. 18연대는 계속해서 남하였고, 남하하다가 조치원에서 미군과 만
나전투를벌이기도하였다.18연대는본대보다앞질러나가도로를차단하고전투를벌
였다. 그는 원래 기독교를 믿었다. 그러나 북에서는 기독교인을 반동분자로 취급하였다.
신의주에서 훈련받는데, 주일 날 종소리가 들리면 ‘반동분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기독교인라고 적어 부대에서 상관들한테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
였더니의심을하지않게되었다.
낙동강 전선인 창녕에서 그는 포로가 되었다. 1950년 9월 후퇴명령을 받고 부대가 후
퇴할 때 낮에는 산에 있고 밤에만 이동하였다. 하루는 동료 2명과 함께 내려가 보초를
섰다. 목화밭인데 밭이 딱딱하여 흙을 조금 파서 앞에 놓고 엎드려 있었는데, 미군 탱크
가 8~9대가 올라왔다. 탱크에서 포를 쏘아 하늘이 노랗고 등에 돌이 떨어지곤 하였다.
양쪽에서 보초를 서던 동료들은 미군의 총에 맞아 모두 죽은 다음 그는 투항했다. 이때
통역관이“야,너는이제살았다”고이야기해주었다.
전쟁 중이라 옷을 빨아 입을 수가 없어 이가 많았다. 포로로 잡힌 뒤 바로 속옷은 버
리고 미군이 준 속옷을 입었고, 신발도 잘라 낮게 만들어 신었다. 미군들이 옷 속에 살
보령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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