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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경 유학을 통해 그림을 배운 다른 예술가
들과는 달리 그는 김은호 문하에서 일본풍의 공필진
채의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일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용준과 함께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고, 그 결과 전통
적인 문인화풍에 서구적인 기법을 가미한‘신문인화
풍’
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신문인화풍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청대 오창석의 문인화가를 추앙하게 되는
데 그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 그는
“특히 중국의 오창석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오창
석의 그림은 아주 전통적인 동양화의 화풍을 존중하
"나팔꽃" 32X42m 1979년
면서도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과 수법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동양화와는
거리가 먼 일본화풍에 의존했던 화단이 해방이 되면서 갑자기 현대적인 것이라 하여 전통적인 것을 찾기
전에 서양적인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실정을 보고서, 전통을 잘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것을 잘 소화해가
면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평소 장우성의 주장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우성은 오창석의 예술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적 정취가 느껴지는 고유한 신문인화풍을 창조하고 만년의 글씨에서는 오창석
풍이 아닌 부드러운 듯 하면서 골기가 있는 월전풍을 창조함으로써 자신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새로운 예술
정신을 보여주었다.
장우성이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주력했던 것은 인물화였다. 그의 스승 김은호는 면면히 내려오
던 전통화법을 벗어나 근대적인 면모를 새롭게 보여주던 일본회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제자들
에게 지도하였다. 김은호의 지도를 받으면서 장우성이 놀라운 속도로 체득한 것은 바로 사실주의적 묘사와
부드러운 색감으로 표출하는 장식성 넘치는 인물묘사였다. 근대적 인물화의 새로운 제작 방식이 확연히
드러나고 섬세한 필선과 부드러운 색조로 차분한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1980년대 이후로 장우성의 인물화는 간결한 필선과 함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단조로운 선과 장식적인
색채를 탈피하여 수묵화 본연의 서예적 필선과 담백한 묵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때로는 예술과 풍류
를 즐기는 일종의 자화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우성에게 화가로서의 명성을 처음 가져
다주었던 것이 인물화였음을 떠올린다면 만년의 관심은 다른 소재로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장우성이 치
중했던 것은 화조, 영모, 초충, 사군자 등이다. 1950년대부터 점차 중국 근대화단의 대가 오창석(1844-
1927)의 화풍을 참조하면서 장우성은 다양한 공간감과 여백을 실험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학이나 까마귀는 물론이고 물고기나 작은 풀벌레까지도 마치 만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의인화
시켰다. 그 결과 고뇌하는 학, 소리치는 까마귀, 춤추는 유인원, 성난 개구리 등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의
화조화는 의인화가 두드러지고 종종 세태풍자적인 내용을 담는다는 면에서 청대의 유민화가였던 팔대산인
(八大山人)을 떠올리게 한다. 장우성은 사군자뿐만이 아니라 등나무, 복숭아나무, 수선화 등을 비롯하여
이전에는 잘 그리지 않던 장미도 즐겨 그렸다. 그만큼 전통적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주변에서 쉽게 접할
2011_08
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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