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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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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이용한다.홍보지구사업으로저장된물은아직사용하지못하고있다.
낙동리에는냇똘이발달하였다
낙동리 마을의 하천은 논보다 높이 흘렀다. 산에 나무가 없어 침식이 활발하였고, 비가
오면 토사가 유출되어 퇴적되었다. 따라서 점점 하천 바닥이 높아졌다. 이때 주변의 농민들
은 뚝을 높게 쌓아 터지는 것을 막았다. 이래서 주변 논바닥보다 하천의 바닥이 높은 소위
천정천이되었다.낙동리본궁마을에서는이천정천을‘냇똘’이라고불렀다.
본궁마을에는두레,당제,걸립이없었다
최재헌(1935) 씨는 본궁마을에서 두레나 당제, 걸립 등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1935
년생이므로 1950년대 이후로는 두레나 당제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마을에 당산
이라고불리는지명도찾아볼수없다.
1960년대마을주민들이간척사업을하였다
1960년대마을주민20여명의동의를받아마을앞본궁간척지(15정보)와오얏굴간척지(4
정)를막는공사를시작하였다.간척지를설계하여허가를받았고,마을주민들이일해막았
다.주민들은주로리어카로흙을실어날랐으며,나중에는레일을깔고화차를밀고다니기
도하였다.오로지인력으로막은것이다.
당시 제방을 쌓은 돌은 빙도 딴섬에서 캐왔다. 부근에서 딴섬에만 돌이 있어 발파해서
배로2~3톤씩실어다쌓았다.주민들은화약면허가없기때문에,발파용구멍만파고발파
는 면허를 소지한 기술자가 와서 해 주었다. 배는 목선으로 굴 양식하던 주민들이 돌을 실
어오기위해마련한것이었고썰물때돌을싣고,들물때제방자리로운반하였다.
돌을 쌓는 것은 기술자가 하였다. 하만리에 살던 임태호 씨
가 기술자였는데, 그는 낙동
1)
리뿐아니라다른간척지를만드는데도석축기술자로일했다.
1)1930년생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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