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83페이지

217페이지 본문시작

사가 배치되었었다. 당시에는 학교가 생겼어도 주로 남자들만 학교에 다녔고, 여자들은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가 만들어지지 전에는 서당이 있어 한문을 배웠는데 서당
훈장도육지에서들어왔다고한다.
외연도는 400~500명이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마을에 초상이 나면 장례를 모실 때
까지 온 마을 주민들은 일을 하지 않고 애도하였다. 장례를 모실 때까지 동네가 쉬는 것
이다. 상여는 대천 구시에서 만들어 왔는데 사용하지 않은지가 오래되어 현재는 모두 썩
어없어졌다.외연도에서상여가나갈때는북을치면서나간다.
옛날 외연도 주민들의 배는 작은 전마선이었다. 돛대 2개를 달아 바람이 좋으면 사용
하였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 이동하였다. 그물은 없었고 주낙을 놓고 외줄낚시를 하
였다. 옛날에는 고기는 지천이기 때문에 고급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조기, 농어,
갈치 등을 잡아 소금에 절여 팔았다. 조기는 배를 타지 않고 입에 소금을 넣어 절였다.
조기의 미끼는 미꾸라지를 썼고, 노래미는 갯장어를 썼으며, 갯장어는 노래미를 썰어서
사용하였다. 그 시절 조기가 많았다. 그는 조기를 바다에서 바구니로 뜨기도 했다고 한
다. 이런 조기가 외연도 마을 앞에 있는 장벌까지 다가와 후리그물로 잡기도 했다. 후리
그물은 모래로 된 해안에서 그물을 둘러쳐 뭍으로 끌어 올리는 것으로, 한쪽은 뭍에 두
고 다른 쪽은 배를 이용하여 둘러쳤다고 한다. 장벌이 있는 횡견도나 오도에서도 했다.
갈치도 후리그물로 잡았다. 이렇게 많던 고기가 1980년대 이후 그물 사용이 늘어나 어
족자원이고갈되면서자취를감추었다.
외연도 마을은 장마 때 둘로 갈라졌다. 당산 밑에 있는 마을이 안말이고, 장벌 위에
있는마을이밖에말인데,장마가지면두마을사이의낮은곳에물이고여방죽이되는
것이다. 배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밖에말이 사구이고 사구 뒤에 있는 습지
에 배수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습지의 서쪽 제일 낮은 곳에는 언제나 물이 있
었고, 민물고기인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많아, 잡아서 미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배수구를내어습지가없어졌다.
외연도는 1970~1980년대에 걸쳐 낭장망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 새로운 어법이 시
보령시 215

21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