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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시골에 다니면서 팔았다. 당시에는 시집가는 신부가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어가기도 했



지만, 옷감으로 가져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을 짊어지고 보령 관내에 있는 섬들을 모두

?

다녔다.이때가1960년대말이었다.
비단장사가 잘 안되어 건어물장사를 하였다. 섬에서 자랐기 때문에 건어물장사가 맞았
다. 각 섬에 다니면서 멸치나 김을 사서 서울 상회에 팔았고, 어떤 때는 부산이나 목포에 가
서팔기도하였다.그러다가수협중매인이되었다.수협중매인은재산을담보하면누구나
될수있었다.
한 번은 말린 까나리를 두 차 사서 서울로 가져갔다가, 가격이 안 맞아 창고에 넣었는데
상회의직원이모두팔아먹는일도있었다.까나리값을받지못하고모두손해를보았다.
대천간척지가 만들어진 후, 홍어뿌리를 매립하고 집을 지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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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람은 최순방씨 네였고, 다음은 이기원씨 네였으며, 다음은 김명수씨 네였다. 최순방씨
네가제일먼저섬사람들을상대로장사를시작하였는데,집이좁아방이2칸밖에없었다.
이후 이기원씨 네가 집을 크게 확장하여 5~6칸의 방을 마련하고 섬사람들을 상대로 장사
를 하였다. 자연히 섬사람들은 이기원씨 네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기원씨 네는 식당과 여관
역할을하였다.
이곳에 있던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었다. 그래서 허드렛물은 간척지로 내
려가는물을이용하였고,먹는물은갈머리비석있는곳근처에좋은우물이있어길어다먹
었다.리어카로실어다먹었다.
섬에서 대천 시내로 들어오는 배는 1970년 이전에는 쇗개에 댔고, 그 이후에는 대천간척
지제방이시작되는‘홍어뿌리’에댔다.이곳으로들어오는배들은외연도,호도,녹도,삽시
도에서 출발한 장배들이었다. 삽시도의 경우에는 장배가 2~3척 있었다. 장날 들어오는 배
는모두10여척되었고,많은사람들로붐볐다.배를접안할때특별한시설은없었고,가에
다대고나무판자를걸쳐놓고내렸다.배는나무판자를가지고다녔다.
배로물건을싣고오면대천에서리어카를끄는사람들10여명이와서짐을실어주었다.
이들은제방을타고다녔다.
섬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대개 대천장 안날(양력 2일, 7일)에 들어와 짐을 내리고, 다음날 장
을 보아 섬으로 향하였다. 1박2일로 장을 본 것이다. 그래서 홍어뿌리에 섬 주민들을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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