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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교 본부에 다닐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아버지의 도명은 ‘평오장’이었고 큰아버지
는 ‘황오장’이었다. 이름 대신 모두 평오장, 황오장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머리를 깎았
고가사와장삼을싸가지고수운교본부에다닐정도였다.
그녀는 학령기가 되어도 학교는 다닐 수 없었다. 조금 때는 육지로 나가는 길이 열리지
도 않고, 사리 때 열린다 해도 학교 가는 시간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아버지한테 천자문만 배웠다. 한글은 쉽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글 읽는 것을 보고 스스로 깨우쳤다. 나이가 들면서 집안일만 하다가
결혼하였다. 결혼한 후에 아버지가 석대도에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육지로 이
사하였다.
그녀가 6살 때쯤(1938년) 석대도에는 4가구가 거주하였다. 제일 남쪽 끝봉이라고 하
는 곳에는 김상국이 살았는데 수운교를 믿어 ‘대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
그녀의 집이 있었고, 위로 최길남, 임종만이 살았다. 모두 4집이 살았다. 이후 끝봉에 살
던 김상국 노인 부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육지에 거주했기 때문에 3가구가 살았다.
그 중 그녀 집이 가장 컸다. 지붕은 모두 초가였는데 산에 나는 ‘띠’나 육지에 가서 볏짚
을사다가이었다.
석대도에서는 보리, 콩, 옥수수 등 육지와 비슷한 농사를 지었다. 다만 석대도에 소를
키우는 집이 없어 쟁기질을 할 수 없었다. 봄·가을 파종기가 되면 무창포나 간드리에서
쟁기질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사리때 물이 빠지면 들어왔다가 밭을 갈고 다음날 물이
빠지면 나갔다. 그래서 밭을 갈 때는 집에서 쇠죽을 쑤어 먹이고, 쟁기질하는 사람도 재
워주어야 했다. 생산되는 것은 밭곡식뿐이어서 쌀은 사다 먹고, 일제강점기에는 배급을
타먹기도하였다.
아버지는 작은 배를 가지고 있어 어업을 하였다. 주낙을 놓아 조기 보골치 같은 것을
잡아, 칼로 등 부분을 갈라 포를 만들어 팔고, 소라껍질을 새끼줄에 매달아 주꾸미를
잡아 팔았다. 고기를 많이 잡지는 못해 큰 소득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가족이 생활하
는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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