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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에서 중함을 보임이 이와 같았다.
슬프다. 공의 처지가 부귀에 얽매이지 아니함이 이미 어렵거든 하
물며 그 문장이 빛나고 재주가 민달하니 그로 하여금 차례대로 나갔
더라면 넉넉히 가히 조정에 등용되어 공경들의 일을 도울 수 있었으
나 나라의 제도에 국한되어 마침내 능히 한두 가지를 베풀어 펴지
못하고 하늘이 또 그 수를 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애석하도다.
공의 선대는 신라의 종성에서 나와서 인하여 경주에 관적을 하고
고려 태사 인관(仁琯)으로 비조를 삼았다. 려말 휘 자수(子粹) 호 상
촌(桑村)은 조선조에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충성을
세웠다. 고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서로 이어져 고조 휘
홍욱(弘郁)은 황해도 관찰사인데 직언으로 上상하여 총재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고 증조 휘 세진(世珍)은 금정 찰방으로 좌
찬성을 증직 받았다. 조 휘 두성(斗星)은 성균 생원으로 영의정을 증
직하고 고의 휘 흥경(興慶)은 영의정으로 세 조정을 내리 섬겨서 옛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비 창원황씨는 평시령 하영(夏英)의 따님이시
고, 추上(秋浦) 문민공(文敏公) 신(愼)의 현손이다.
공은 무인 정월 4일 질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시에 돌아보아 후
사를 말함에 심히 다스려서 슬퍼하는 화색이 없게 하고 청하여 백형
의 자식 이주로 후계를 삼고, 곁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거두게 하고 수연히 돌아가니 향년이 39세이었다. 옹주는
온순하고 정숙하며 성품이 금이나 진주 등 사치하고 화려함을 좋아
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친히 소학과 열녀전을 주어서 대의를 통하였
고, 겨우 9세에 효장의 세자상을 만나서 통곡하기를 마치 성인과 같
이 하여 비록 죽을 마셔도 임금이 드시지 아니하면 드리기를 즐겨
206 예산군지(1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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