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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시대 사람들은 가문 계승을 중시하고 조상 봉사를 중시하였다. 부모를 봉양하고,
일반적으로 시묘(侍墓)살이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 중 첫 번째는 만사를 제쳐 두
돌아가면 그 선영을 관리하며 제사 지내는 것을 인간 삶의 도리로 삼았다. 그리고 장자가 중
고 무덤을 지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식은 부모의 무덤 한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대소상 기
심이 되어 그 소임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시대 상속 풍속
간 동안 묘를 지킨다. 두 번째는 낮 동안 생업에 임하고 밤에 가서 묘를 지키는 것이다. 세 번
을 담은 분재기(分財記)이다. 분재기의 첫머리에는 으레 조상 제사와 관련된 대목이 눈에
째는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가 곡을 하고 주변을 살펴본 뒤 돌아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뜨인다. 곧 사당을 유지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데에 먼저 재물을 안배한다. 그리고 난 뒤 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례이다. 산중에서 1년이나 2년 동안 밤을
식들 각각에게 재산을 분배하는데, 여기서도 장자에게 가장 많은 몫의 재물을 나누어준다.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벌레나 짐승이 들끓고 한겨울엔 뼛속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문을 유지하고 조상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다. 의 동생
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시묘살이에 대해 알고 있지만 실
이순이 형의 조상 봉사를 염려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이순은 자신이 곤궁함에도 형의 어
제로는 실천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성만 형제는 다수가 행하지 못하는 시묘살이를 자식된
려움을 생각하여 재물을 나르고 있다.
자의 도리로 알고 행하였다.
종결부의 ④는 형제간의 우애가 확인되는 서사부이다. 두 형제가 서로 자신의 재물을 가
그리하여 이성만 형제의 효행은 마을이나 국가로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두 형제의 효
져다주려는 순수한 마음이 우연스럽게 공개되는 현장이다. 그들은 컴컴한 밤중에 비좁은 다
행담은 당대의 성군인 세종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들은 세종은 이성만 형제에게 서사 단락
리에서 갑작스럽게 마주쳐 충돌했다. 아마도 비좁은 섶다리였다면 충돌하여 다리 아래로 떨
⑤와 같이 정려를 내리고, ‘효행과 우의의 가풍을 영세토록 전하라.’고 명하게 되었다.
어질 수도 있을 법하다. 볏가마니를 짊어지고 물로 곤두박질치는 그림은 희화적일 수도 있
추정컨대 임금의 이러한 표창은 이 고장의 풍속을 순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일까?
이 고장의 많은 자녀들이 두 형제의 미담에 귀감을 얻어 부모 섬기기에 보다 정성을 쏟았을
한편, 1497년 세워진 효행비는 사실적인 내용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이미 앞에서 지문
것이다. 효행의 표창이 있고도 한참 뒤인 1497년에 를 세운 것도 이 고장의
(의좋은 형제 비문)으로 소개한 까닭에 그 줄거리를 간추려 아래에 제시한다.
효행과 우의정신을 고양하기 위함이다. 곧 이 고장 예산 사람들은 두 형제의 아름다운 사연
을 예산의 정신으로 삼아 전승하려 하였다고 하겠다.
①대흥호장이성만,이순형제는부모생전에맛있는음식을장만하여부모를봉양하였다.
②봄가을로친척을불러술과안주를대접하여부모를기쁘게하였다.
2.관음사사적기
③부모사후형은어머니의무덤을지키고아우는아버지의무덤을지켰다.
④형과아우가서로오가며밥을먹었고,맛난것을얻으면함께나누어먹었다.
는 말 그대로 관음사의 개창
⑤임금이이들형제를궐내로정표문려하고자자손손가풍을삼아영세토록전하라하
유래를 담고 있는 사찰연기담이다. 고래로부터 명문 사찰은 연기담을 보유하였다. 존경할
였다.
만한 스님이 일생에 걸쳐 수도를 하고 그런 바탕에서 절을 지었다는 사실적인 내용이나, 신
비문은 구전 설화에서 볼 수 없는 일화가 부가되어 있다. ‘맛난 음식으로
이성(神異性)을 동반한 사건이나 일화로 인해 사찰을 지어 불법을 전하게 되었다는 등의 사
부모를 봉양했다.’거나 ‘친척을 불러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는 등의 구체적인 효행을 기록
찰연기담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찰연기담은 마치 족보와 같은 성격을 띠어서 그 중요
하고 있다. 여기에 부모님의 시묘살이에도 소홀하지 않았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이성만 형
성을 더하였다. 특히 신이성을 동반한 사찰연기담은 해당 사찰을 홍보하는 데 긴요하게 기
제의 구체적인 효행 기록을 비문은 담고 있다.
능하였다. 도 이 같은 목적의 바탕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4.공동체사회와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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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일반적으로 시묘(侍墓)살이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 중 첫 번째는 만사를 제쳐 두
돌아가면 그 선영을 관리하며 제사 지내는 것을 인간 삶의 도리로 삼았다. 그리고 장자가 중
고 무덤을 지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식은 부모의 무덤 한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대소상 기
심이 되어 그 소임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시대 상속 풍속
간 동안 묘를 지킨다. 두 번째는 낮 동안 생업에 임하고 밤에 가서 묘를 지키는 것이다. 세 번
을 담은 분재기(分財記)이다. 분재기의 첫머리에는 으레 조상 제사와 관련된 대목이 눈에
째는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가 곡을 하고 주변을 살펴본 뒤 돌아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뜨인다. 곧 사당을 유지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데에 먼저 재물을 안배한다. 그리고 난 뒤 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례이다. 산중에서 1년이나 2년 동안 밤을
식들 각각에게 재산을 분배하는데, 여기서도 장자에게 가장 많은 몫의 재물을 나누어준다.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벌레나 짐승이 들끓고 한겨울엔 뼛속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문을 유지하고 조상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다. 의 동생
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시묘살이에 대해 알고 있지만 실
이순이 형의 조상 봉사를 염려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이순은 자신이 곤궁함에도 형의 어
제로는 실천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성만 형제는 다수가 행하지 못하는 시묘살이를 자식된
려움을 생각하여 재물을 나르고 있다.
자의 도리로 알고 행하였다.
종결부의 ④는 형제간의 우애가 확인되는 서사부이다. 두 형제가 서로 자신의 재물을 가
그리하여 이성만 형제의 효행은 마을이나 국가로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두 형제의 효
져다주려는 순수한 마음이 우연스럽게 공개되는 현장이다. 그들은 컴컴한 밤중에 비좁은 다
행담은 당대의 성군인 세종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들은 세종은 이성만 형제에게 서사 단락
리에서 갑작스럽게 마주쳐 충돌했다. 아마도 비좁은 섶다리였다면 충돌하여 다리 아래로 떨
⑤와 같이 정려를 내리고, ‘효행과 우의의 가풍을 영세토록 전하라.’고 명하게 되었다.
어질 수도 있을 법하다. 볏가마니를 짊어지고 물로 곤두박질치는 그림은 희화적일 수도 있
추정컨대 임금의 이러한 표창은 이 고장의 풍속을 순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일까?
이 고장의 많은 자녀들이 두 형제의 미담에 귀감을 얻어 부모 섬기기에 보다 정성을 쏟았을
한편, 1497년 세워진 효행비는 사실적인 내용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이미 앞에서 지문
것이다. 효행의 표창이 있고도 한참 뒤인 1497년에 를 세운 것도 이 고장의
(의좋은 형제 비문)으로 소개한 까닭에 그 줄거리를 간추려 아래에 제시한다.
효행과 우의정신을 고양하기 위함이다. 곧 이 고장 예산 사람들은 두 형제의 아름다운 사연
을 예산의 정신으로 삼아 전승하려 하였다고 하겠다.
①대흥호장이성만,이순형제는부모생전에맛있는음식을장만하여부모를봉양하였다.
②봄가을로친척을불러술과안주를대접하여부모를기쁘게하였다.
2.관음사사적기
③부모사후형은어머니의무덤을지키고아우는아버지의무덤을지켰다.
④형과아우가서로오가며밥을먹었고,맛난것을얻으면함께나누어먹었다.
는 말 그대로 관음사의 개창
⑤임금이이들형제를궐내로정표문려하고자자손손가풍을삼아영세토록전하라하
유래를 담고 있는 사찰연기담이다. 고래로부터 명문 사찰은 연기담을 보유하였다. 존경할
였다.
만한 스님이 일생에 걸쳐 수도를 하고 그런 바탕에서 절을 지었다는 사실적인 내용이나, 신
비문은 구전 설화에서 볼 수 없는 일화가 부가되어 있다. ‘맛난 음식으로
이성(神異性)을 동반한 사건이나 일화로 인해 사찰을 지어 불법을 전하게 되었다는 등의 사
부모를 봉양했다.’거나 ‘친척을 불러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는 등의 구체적인 효행을 기록
찰연기담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찰연기담은 마치 족보와 같은 성격을 띠어서 그 중요
하고 있다. 여기에 부모님의 시묘살이에도 소홀하지 않았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이성만 형
성을 더하였다. 특히 신이성을 동반한 사찰연기담은 해당 사찰을 홍보하는 데 긴요하게 기
제의 구체적인 효행 기록을 비문은 담고 있다.
능하였다. 도 이 같은 목적의 바탕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4.공동체사회와민풍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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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205페이지 본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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