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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사업은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사다가 항구에 내다 파는 것으로 광천 독배를 자주 다
니고 강경으로 팔러가기도 하였다. 일반 생선은 광천으로 가지만, 강다리 등 젓갈 담는
고기는 강경까지 올라가 팔았다. 사업이 번창한 덕에 이정우는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어렸을 때는 농사일도 안 하고, 남들이 먹었다는 콩깻묵을 먹지도 않았다. 돈이 많아서
화폐 개혁할 때 돈을 다 바꾸지 못할 정도였고, 나일론 옷도 마을에서 가장 처음 입었다
고한다.
1960년대 초에는 납작한 12마력짜리 발동선(영성호)을 건조하여 먼 바다까지 나가
많은 고기를 잡아 돈을 벌었다. 고기를 얼마나 잘 잡았던지 아침에 나가면 저녁때 기를
꽂고 돌아왔고, 영성호 고기는 따로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배는 톤수에 비해 매우 납
작하여 먼 바다까지 나갈 수 있었다. 삽시도 사람인 박생길이 지었는데 기계는 마산에서
사왔다.박생길은배짓는기술자였다.
1936년생인 그가 취학할 나이인 8세가 조금 넘어 삽시도에 간이학교가 생겼다. 간이
학교는 술등 박영삼 집 옆에 있었는데 없어지고 현재의 자리에 학교를 세워 취학하게 되
었다.그의나이는적은편이고훨씬나이많은사람들과함께학교에다녔다.
그는 훗날 14년간 옛 학교의 육성회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발전과 삽시도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학교의 교실이 옛날에 지은 목조건물이어서 다시 짓는데
옛 시절 담임 교사였던 이희일 교육장의 힘이 컸다. 교육장과 관리과장의 배려로 운동
장에교실을짓게되었고운동장은앞으로확장하였다.운동장확장할토지대금을마련
하기 위하여 메구(풍물)를 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얼마만큼의 성금이 모아졌다. 이
것을 가지고 땅 주인인 박영삼을 찾아가 운동장 부지를 내줄 것을 부탁하자 흔쾌히 허
락했다. 이후 운동장 부지를 돋는 일은 삽시도리의 7개 반별로 작업량을 할당하여 해결
하였다. 이후 학교가 없는 섬 아이들 기숙사까지 지어 6학급 115명의 학생이 삽시초등
학교에취학하였다.
6·25전쟁 때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이정우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가족은 여
차하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박영삼의 사위가 당진경찰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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